얼핏 보아도 아직 부모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 열두 살 소년이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자신이 먹을 씨리얼을 그릇에 담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능숙한 모습. 코너는 부모의 이혼 후에 엄마와 둘이 살고 있다. 그의 엄마는 말기 암에 걸려 쇠약한 모습이다.

그러던 어느 날, 코너의 삶에 불청객이 찾아온다. 매일 밤 시계가 12시 7분을 가리키면 거대하고 흉측하게 생긴 괴물이 코너의 방 창문을 뚫고 들어와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괴물은 다짜고짜 자신이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그 이야기가 끝나면 코너가 네 번째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소년에게 말한다. 코너는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며 괴물에게 저항하지만, 괴물은 이를 듣지 않는다.
괴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왕이 되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는 왕자의 이야기, 젊은 목사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 투명 인간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마음속에 모순된 두 개의 감정을 지닌 왕자, 믿음이 없어 딸들의 죽음 앞에 흔들린 목사, 외로운 투명 인간은 사실 코너 자신이었다는 것을 이후에 깨닫게 된다. 코너가 엄마의 죽음을 앞두고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마음속 진실은 악몽(잡고 있던 손을 놓쳐 엄마를 떠나보내는 꿈)으로 나타나고, 괴물은 그러한 두려움 속에 있는 코너를 현실 위로 끄집어내어 준다.
“세상에는 거짓 같은 진실도 많아.
이야기에 늘 착한 사람이 나오는 건 아냐.
늘 나쁜 사람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사람은 그 중간이지."
코너는 괴물의 말에 격렬하게 저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고 싶은 두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괴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듣던 동화의 아름다운 결말이 아니었다. 왕자가 적과 싸움에서 이긴 후 공주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거나, 목사가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이야기가 아닌, 현실과 타협하거나 굴복하는, 혹은 선하면서도 악한, 사랑하지만 떠나보내는 등 인간의 이중성이 담긴 이야기들이었다.
코너의 꿈, 즉 괴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운 현재 상황이 차라리 끝났으면(엄마와 이별하고 싶은) 하는 소년의 무의식적 소망이 담겨있었다. 엄마를 지키고 싶은 마음과 엄마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 사이의 투쟁이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며, 결국 자신이 싫어하지만 앞으로 함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외할머니의 물건들을 다 깨부수는 행위로 표출된다.
“뭔가 부셔야 한다면, 시원하게 부숴버려.
엄마가 거기 있을게, 코너."
엄마는 곁에 있어 주지는 못하지만, 아이의 마음에 힘을 실어준다. 상실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린 나이. 하지만 코너는 그렇게 엄마를 마음에서 떠나보낼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다. 소년은 엄마를 떠나보내기 싫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이 그만 끝났으면 하는 양가감정(Ambivalence) 때문에 더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괴물은 결국 코너의 솔직한 마음을 내뱉도록 격려하는 소년의 또 다른 자아인 셈이다.
영화 〈몬스터 콜〉은 열두 살 소년이 어머니의 상실을 통해 내적인 성장을 이루어내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상실과 성장’ 얼핏 보면 이질적인 두 가지 개념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길목에서 만나 갈등을 겪고 투쟁하지만, 결국 화해의 길로 함께 나아간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상실한다. 젊음을 상실하고, 가깝게 지내던 지인을 상실한다. 품에 있던 아이를 사회로 내보내며 마음 한구석에 상실감을 경험하고, 파트너와의 사랑을 상실한다. 떠나보낸 이의 자리에 다른 누군가로, 혹은 행위로 채우기도 하지만 공허함과 우울감은 우리 곁을 맴돈다. 애도는 누구에게든 쉽지 않은 일이다.
텅 빈 자리는 어쩌면 가장 솔직한 나를 만나는 자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자리든, 성취가 있었던 자리든, 상실은 나의 민낯을 보게 해준다. 민낯을 거부하면 할수록 진실에서 멀어지고 피상적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성장은 자신의 어색한 민낯을 바라보고 애정을 갖고 어루만져주는 것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는 한 가지 마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양가감정 속에서 싸운다는 진실을 받아들일 때 성장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영화 속 주인공 코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