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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찬의 시베리아 유랑기 23

내가 사랑한 겨울나무

자작나무의 나라, 러시아

송종찬 시인  20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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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아주 길었다. 겨울밤을 나기 위해 간간이 한국 방송을 녹화한 후 보았다. 가장 자주 본 프로그램은 한국기행이었다. 남해와 서해의 갯마을, 지리산과 설악산의 산마을을 보면서 동무들을 떠올렸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음악 프로그램을 보았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한 출연자가 ‘기다림’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미칠 것 같아 기다림은 아직도 어려워…… 속삭여 불러보는 네 이름…… "  창 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고 봄은 멀리 있는데 ‘기다림’이라는 단어 때문에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러시아만큼 기다림이란 단어가 사무치게 다가오는 곳도 없을 것이다. 눈 쌓인 벤치, 인적이 끊어진 정거장, 성당의 첨탑 끝에서 흔들리는 종이 기다림의 상징처럼 보였다. 들판은 눈이 녹기를 기다리고 강은 얼음이 풀리길 기다렸다. 전나무 가지 끝을 옮겨 다니는 새와 얼음장 아래서 숨을 죽인 물풀도 사람만큼이나 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러시아인은 기다림에 익숙하다. 짜르 시대나 소련시절, 기다림은 숙명이었다. 귀족에게 팔려가는 딸을 농노는 바라보아야만 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혁명을 위해 혹은 전쟁터로 홀연히 떠나가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가 저녁밥을 지어놓고 대문을 자주 내다보는 것은 기다림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빨래를 개던 아내가 먼 기적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기다림 때문이다.

 

누가 작명했는지 모르지만 자작나무의 꽃말이 ‘당신을 기다립니다’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정말 어울리는 꽃말이다. 자작나무는 기다림의 상징이다. 만일 지구 온난화로 지구를 떠나야 할 때 러시아에서 가져갈 세 가지 것을 고른다면 보드카, 여자, 자작나무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두 가지만 골라야 한다면 보드카를 버리겠다. 마지막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자작나무를 가져가겠다. 왜 여인이 아니냐고 물을지 모른다. 아쉽지만 여자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고 아름다움이란 변하기 쉽다.

 

러시아는 자작나무의 나라다. 자작나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곳은 러시아 땅이 아니다. 시베리아를 횡단할 때 기차의 유리창에 비치던 자작나무, 차를 몰고 벌판을 달려갈 때 사열하듯 스쳐 지나가던 자작나무. 성당의 십자가 아래, 마을의 초입에도 자작나무가 있다. 풍경만이 아니었다. 자작나무는 러시아인의 생과 사에 걸쳐있다. 날마다 쓰는 빗부터 가구, 악기, 심지어 관까지 러시아인의 생활 속에서 자작나무를 빼고는 얘기할 수 없다.

 

계절의 변화도 자작나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월의 어느 아침, 자작나무 빈 가지에 연둣빛 잎새가 돋기 시작하면 봄이 온다는 신호였다. 잎새는 하나 둘씩 피어나지 않고 푸른 이내처럼 자욱하게 올라왔다. 겨울의 두터운 장벽을 자작나무의 연한 몸짓이 무너뜨린 것이다. 잎새가 피어나면 가슴 아래서는 뜨거운 기운이 울컥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살얼음 언 강을 건너가 겨울을 이기고 돌아온 전사들을 안아주고 싶었다. 자작나무의 하얀 수피에는 온통 칼바람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여름에는 자작나무숲이 나를 유혹했다. 믿었던 이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자작나무 아래서 얼마나 오래 서성였던가. 잎새가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에는 지상의 악기로는 모방할 수 없는 환희와 쓸쓸함이 공존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자작나무 아래를 거닐며 잎새들의 합창을 들었다. 자작나무 아래 누워서 뭉게구름이 흘러가는 하늘 끝까지 가보기도 했다. 삼 십 분 정도 나무 아래 머물다 보면 근심이 빗자루에 쓸리듯 사라지곤 했다.

 

러시아의 가을은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가고 만다. 만일 자작나무가 없었다면 가을은 마침표도 없이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구월 하순 자작나무는 지상에 마지막 빛을 선사하겠다는 듯 황금빛으로 물든다. 작가 김훈은 자작나무 숲을 빛들이 모여 사는 숲으로 묘사했는데, 그보다 정확한 묘사는 없을 것 같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지만 빛나는 순간은 너무나 짧다. 황금빛 숲은 열흘 만에 사라지고 만다. 자작나무가 잎새를 떨구기 시작할 때쯤이면 마지막 황금을 찾는 기분으로 숲으로 달려가곤 했다.

 

자작나무가 가장 고귀하게 보이는 순간은 겨울이다. 자작나무는 함께 모여 숲을 이뤄도 좋지만, 혼자여도 좋다. 홀로 서있는 자작나무는 다정한 친구이자 숨겨둔 애인이었다. 자작나무는 막차를 놓치고 술에 취해 귀가할 때 손을 벌려 안아주었고, 보름 동안이나 해가 들지 않는 때에도 어둠 속에서 은빛가루를 날려주었다. 눈이 그친 어느 날 자작나무숲 속으로 얼비치던 햇살에서 떠올랐던 단어, 그것은 희망이었다.

 

자작나무는 여인을 닮았다. 선이 곱다. 섬섬옥수 같은 잎새, 새하얀 피부, 생머리처럼 치렁치렁한 줄기. 러시아에서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자작나무가 여인으로 보이고, 여인이 자작나무처럼 느껴진다.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가난한 지식인 라스꼴리니꼬프를 사랑한 소냐, 부활에서 자신의 몸을 망친 네흘류돌프를 사랑한 카츄샤, 브론스키를 사랑한 유부녀 안나는 모두 자작나무의 분신들이다.

 

그대 사랑을 잃고 눈물이 마르지 않을 때 자작나무 숲으로 가보세요. 그대 세상과의 전쟁에서 패해 퇴로를 차단당했을 때 자작나무 옆에 가만히 서보세요. 자작나무는 당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작자작 당신의 등을 토닥거려 줄 것입니다.

 

가도 가도 지평선만 보이는 황량한 벌판에 자작나무가 손 흔들지 않는다면, 석양빛이 낮게 깔리는 저물녘에 성당의 종소리를 받아줄 자작나무 잎새가 없다면, 사랑을 잃고 빈 손으로 귀향할 때 자작나무가 안아주지 않는다면 러시아의 겨울은 얼마나 깊고 적막하겠는가.

 

 

자작나무  

 한 겹 한 겹 옷을 벗겨도

은빛 속살은 드러나지 않았다

발끝으로 사랑을 노래하던 발레리나

종아리에 감싼 붕대를 풀고 풀어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손끝으로 이별을 노래하던 발레리나
세상을 헤매다 빈 손으로 돌아올 때도

마을 앞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온몸으로 나를 반겨주던 발레리나

혹한의 폭설에도 무너지지 않는
그대를 사랑하는 나는

글ㅣ 송종찬
고려대학교에서 러시아문학을, 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전공했다. 1993년 <시문학>에 ‘내가 사랑한 겨울나무’외 9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 시집 ‘그리운 막차’ ‘손끝으로 달을 만지다’ ‘첫눈은 혁명처럼’ , 산문집으로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 이 있다. 2011년부터 4년여 동안 러시아 체류하며 외국문학도서관 부설 루도미노출판사에서 러시아어시집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Транссибирские Ночи) 을 출간했고, 루스키미르재단의 초청작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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