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살 윤정 씨는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이다. 그녀는 직장 내에서 겪는 불편한 대인관계 문제로 상담실을 찾았다. 같은 해에 입사한 동기들은 회사 선배들과도 무던하게 잘 지내고 관계가 어렵지 않은데 유독 자신만 선배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이 자신을 안 좋게 평가할까 봐 노심초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선배 공포증’은 입사한 지 2년이 지나서도 나아지지 않았고 급기야 퇴사해야 할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회사인 만큼 참고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이 되어 심리상담을 받게 되었다.
그녀가 호소한 심리증상은 불안과 우울이었다. 자신보다 권위 있는 위치의 상사나 선배에게 업무평가를 받을 때면 그녀의 불안 증상은 극에 달했다. 조금이라도 안 좋은 평가를 들은 날에는 이내 극심한 우울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직장에서 늘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을 때는 밤을 새워서라도 일에 몰두했다. 오로지 그녀에게 중요한 일은 선배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이었고, 충분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날에는 자신이 벌레처럼 느껴져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6개월 동안 진행된 상담에서 윤정 씨는 회기마다 마치 숙제를 검사받는 어린아이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우리는 그녀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 즉 윗사람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 병리적으로 집착하는 인정 욕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상담이 얼마 진행되지 않아 우리는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 두려움의 기저에는 ‘엄마’라는 커다란 존재가 있다는 것을.
그녀의 엄마는 딸이 취업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했음에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필요하거나 힘들어하면 바로 달려와 주는 ‘헌신적이고 든든한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 윤정 씨는 그러한 엄마가 자신 곁에 있어서 든든했고 회사 내의 스트레스나 퇴사에 대한 갈등문제를 매일같이 엄마와 상의했다. 그녀의 휴대전화 단축키 1번은 늘 엄마였고, 엄마는 그녀가 사회에서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녀는 물리적으로는 성인이었지만 심리적으로는 마치 일곱 살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윤정 씨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지극히 평범하고 어떤 분야에서도 두각을 보이지 않는 언니에 비해 그녀는 초등학교 때부터 모든 과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고 늘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여리고 겁이 많았던 사춘기 소녀 윤정 씨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따랐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엄마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거리인 딸을 보며 흐뭇해했고, 무능력한 남편에 대한 실망감과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딸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윤정 씨가 상담에서 호소한 윗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인정에 대한 갈구는 그녀가 자라난 환경에서 기인했다. 엄마에게 사랑받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는 눈치 보는 아이가 되어 엄마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삶에서 절대적 존재인 엄마가 원하는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구나 감정에 귀 기울이기보다 엄마의 욕구나 감정을 먼저 헤아리고 돌보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마음속에 무언가 하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면 자연스레 그것을 마치 느끼면 안 되는 감정으로 인식하여 억압하거나 회피했다. 그러한 욕구는 대개 엄마가 바라는 것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윤정 씨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엄마의 평가와 감시에 벌벌 떠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는 듯했다. 착한 아이가 되지 않으면 혼나고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에 떠는 아이가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아이는 그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다녔다. 연애할 때도, 직장에서도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상대를 ‘엄마’로 동일시한 것이다.
어린 시절 중요한 대상에게 느꼈던 감정을 어른이 되어서 비슷한 역동을 일으키는 대상에게 다시 느끼는 것을 정신분석에서는 ‘전이(Transference)’라고 부른다. 윤정 씨가 권위자의 평가에 유독 민감하고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을 때 자신을 벌레로 여길 정도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이유도 이러한 전이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상담을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엄마에게 화가 났고 원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러한 감정은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본인의 삶을 포기하고 딸을 위해 헌신한 엄마를 지금에 와서 밀어내는 자신이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처럼 느껴져서 죄책감에 힘들어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성인 윤정 씨는 엄마로부터 처절하게 독립하고 있는 듯했다.
윤정 씨의 사례는 상담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경우다. 많은 사람이 이렇듯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역할에서 한 부분이 적절하게 기능하지 못해서 상담실을 찾는다. 그녀가 겪은 갈등은 ‘타인이 원하는 나’와 ‘내가 되고 싶은 나’의 충돌에서 발생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타인인 엄마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그녀의 엄마가 원하는 자아, 즉 ‘거짓 자기(False Self)’를 만들어냈고, 그녀가 가진 고유한 ‘참 자기(True Self)’는 마음속에서 소외시켰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인 도널드 위니캇(Donald Winnicott)은 누구든 이러한 거짓 자기로 살아가게 되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없게 되며, 내가 누구인지 혼미한 채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이렇듯 참 자기와 거짓 자기 사이에서 갈등하며 괴로워하는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된다. 어쩌면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모든 사람이 이 문제로 상담실을 찾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특유의 위계 문화에서는 윗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야 하고 그것을 어길 때는 불이익이 따르기도 한다. 그 경우에 개인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구와 감정을 ‘느끼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하며 마음속에서 억압해버린다.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모르니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라 하게 되고, 사소한 결정도 하지 못하고 타인이 결정해주기를 바라는 ‘결정 장애’를 겪게 되기도 한다.
오랜 세월을 살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마음에 관해 연구하며 내가 통찰한 것은, 변화란 타인이 부여해준 거짓 자기를 하나씩 벗고 참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해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신경증적 증상을 겪는다. 최근 자기계발서 시장에서는 ‘나다운 삶’, ‘나답게 사는 것’이 화두이다. 하지만 나다운 삶은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는데 개인의 감정이나 욕구가 억압되어온 사회에서는 이것을 아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윤정 씨의 엄마도 딸의 심리적 독립을 막으려고 그녀를 과잉보호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감정과 좌절된 욕구가 그녀의 딸에게 무의식적으로 투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윤정 씨와 그녀의 엄마에게 필요한 일은 각자의 정서적 독립,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이해다.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행동을 이해하고 그 속에 있는 욕구와 감정을 알아차리지 않는다면 둘 사이의 관계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한 채 미궁 속으로 빠질 것이다.
변화란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입혀준 껍데기들을 하나씩 벗겨가며
원래 타고난 나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다.
* 이 글에 소개된 내용은 필자의 저서 《적당한 거리》의 일부를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내담자의 privacy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고 일부 상담내용은 각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