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심리상담을 받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너무나 ‘착해서’ 사람들 속에서 늘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다. ‘나쁜 건 넌데 아픈 건 나야’라는 누군가의 책 제목처럼, 자신은 타인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진실하게 살았는데 늘 상처받는 것은 자신이라며 눈물을 떨군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억울함과 화, 슬픔, 상실감이 서려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는데 정작 사회에서는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간다. 그들은 일에서도 훨씬 성과를 잘 내고 심지어 대인관계마저 좋다. 상사의 사랑을 받는 것은 보너스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렸을 적에 배웠던 가르침과는 반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 같아 심리적인 혼란이 온다. 그러면 마음먹는다. 더는 착하게만 살지 않기로, 나도 내 것을 챙기기로.
그렇게 마음먹었음에도 세상살이는 여전히 녹록지 않다. 세상에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이기적인 사람이 많고 그들에게 대항하며 살기에는 강인함을 타고나지 못했다. 사람들 속에서 감정 소모를 많이 한 탓인지 쉬이 지치고 애꿎은 가족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돌리기도 한다. 그들은 나에게 말한다.
"선생님. 도대체 어떤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요."
오랫동안 개인의 삶을 지배해오던 가치관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 정답이 아닐 때, 혹은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할 때 우리는 심리적 혼란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런 혼란은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기인한다.
경희씨는 오랜 시간 동안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어린 시절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늘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하고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들어왔다. 그런 아버지는 가족에게는 소홀하면서도 친구나 동네 사람들에게는 후하게 대접했다. 주말이면 동네 사람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해서 잔치를 벌였다. 덕분에 경희씨는 매일 같이 어머니가 잔치 음식을 차리는 일을 도와야 했고 설거지는 늘 그녀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인기 있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초등학생 때부터 경희씨는 자신을 챙기기보다 주변 친구들을 챙기기 바빴다. 친구가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면 친구의 것까지 챙겨오기도 하고, 친구가 게임에서 지는 것이 마음이 불편해서 일부러 져주는 아이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도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타인이 조금이라도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늘 신경 쓰며 착한 아이가 되려고 했다.
그런데 경희 씨가 성인이 되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동료가 그녀의 착한 심성을 이용하여 하나둘 그녀에게 일을 떠맡기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호의로 몇 번 도와준 것이 나중에는 수십 배의 일이 되어 돌아왔다. 심지어 집에 제사가 있는 날인데도 상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기도 했다.
경희씨가 나를 찾아오게 된 것은 계속된 야근으로 건강이 나빠져 휴직하게 되면서였다. 경희 씨는 20대임에도 얼굴에는 생기가 전혀 없었고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그녀의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상담을 받을 때도 드러났는데, 상담가인 나에게조차 착한 아이처럼 굴고 나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진짜 자신과 만나야 하는 순간에도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한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이 내 마음을 짠하게 했다.
“경희 씨는 참 외로웠을 것 같아요. 늘 남을 위해 사느라 정작 자기 자신은 돌보지 못했으니까요."
상담이 중반부를 향해갈 때쯤 나는 그녀에게 내 마음을 이야기했고 그 말을 듣던 경희씨의 눈에서 마침내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남들에게는 친절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소홀했던 자신을 그제야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녀는 누가 봐도 착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에게는 더없이 가혹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안 하고 싶은지 마음을 들여다봐 주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들도 ‘이런 감정을 느끼면 안 돼’라며 부인했다. 타인에 대한 친절함은 그녀를 ‘해야 하는 것’에 집중하도록 만들었고 ‘하고 싶은 것’을 도외시하게 했다. 자신을 생각하고 아끼는 행동조차도 이기적인 것으로 믿어온 그녀였다.
조안 루빈-뒤취(Joan Rubin-Deutsch)는 그녀의 저서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모든 사람은 유년시절 부모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 ‘어떠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내적 계약을 마음속에서 만들고 그에 맞춰 행동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대개 그들이 되고자 하는 모습은 부모의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 메시지를 통해 형성된다.
경희 씨의 경우 아버지가 원했던 모습, 즉 예의 바르고 친절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누르며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물론 이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직장에 다니면서 그녀가 공고히 지켜오던 내적 계약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경희 씨는 6개월째 나에게 상담을 받는 중이다. 우리의 상담목표는 ‘나에게 친절해지기’이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무엇을 하기 싫은지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욕구와 감각에 집중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앞으로 경희 씨는 타인의 욕구를 들어주느라 무시했던 자신의 욕구를 하나씩 인식하고 채워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몸소 체득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어떤 말이나 던질 수 있다. 그들의 입을 일일이 막거나 행동을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 상처받지 않는 내가 될 수는 있다. 내가 생각해온 ‘착한 행동’이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잠시 멈추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그들을 도움으로써 내가 행복한지 말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남에게 친절한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 남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만 마음이 편한 당신이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신의 어깨에 짊어진 마음의 짐을 하나씩 내려놓는 것이다. 오랫동안 당신을 속박했던 심리적 계약을 끊고 주도권을 자신에게로 가져와야 한다. 오늘은 남들을 배려하느라 소홀했던 나에게 위로와 따뜻한 말을 건네보자. 내가 나를 아끼고 존중할 때 비로소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당신 자신이 꽃을 피우고 무성하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합니다._조안 루빈-뒤취(사회상담가, 작가)
* 이 글에 소개된 내용은 필자의 저서 《적당한 거리》의 일부를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