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청춘인 것 같았다. 항상 젊은이로 살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덜컥’ 나이 마흔을 맞았다. ‘예고 없이’ 인생의 전반전을 마쳤다.
그리고 시작된 인생의 후반전. 눈 깜짝 사이 같았지만 물리적 시간은 어느새 후반전의 절반도 지나가는 듯싶다. 앞으로 남은 것은 인생의 종착역뿐인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인생을 되돌아본다. 내 인생의 대차대조표는 어떠한가? 주는 삶이었는가. 아니면 받는 삶이었는가. 손익계산서는 어떠한가? 노력에 비해 결과가 좋은 편인가, 아니면 나쁜 편인가.
되돌아보면 나는 참 많이 받고 살아왔다. 내가 남에게 준 것보다 남으로부터 내가 받은 것이 훨씬 많았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이 그렇다. 그 분들은 아들들을 잘 키워 놓고도 일찍 여의는 바람에(예전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들 덕은커녕,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의 아들(손자)의 뒷바라지까지 하느라고 등골이 휘셨다. 그러나 나는 그 분들에게 해드린 것이 없다.
학교를 들어가서도, 사회에 나와서도 참 많은 분들의 편의와 도움을 받았다. 내 인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나는 세상으로부터 참 받은 게 많다. 그러나 내가 준 것은 많지 않다. 젊은 시절에는 우쭐한 마음에 받는 것을 당연하게 지금은 마음에 걸리고 부끄럽게 느껴진다.
물론 변명은 있다. 정말 바쁘게 살아온 삶이었다. 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여유와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훈장같이 여기는 나의 삶을 돌아보면 사실 세상을 위한 것도, 내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였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온 ‘무식한’ 삶이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아비판은 이쯤 해두자. 다만 내 인생에서 최소한 받은 것만큼은 돌려주고 세상을 떠나고 싶다. 내 인생 전반기가 ‘받는 삶’이었다면 후반기는 ‘주는 삶’으로 만들고 싶다.
영국의 사회학자 피터 라스렛(Peter Laslett)은 ‘신선한 인생지도(A Fresh Map of Life)라는 책에서 인생을 ‘제1기 인생(the first age)’부터 4기까지로 구분해 설명했다.
▲제1기=출생~교육=의존, 교육의 시기
▲제2기=취업~은퇴=독립, 책임의 시기
▲제3기=퇴직후~건강=자기 성취의 시기
▲제4기= 건강 악화~사망=의존의 시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제3기 인생이야말로 ‘주는 삶’을 실천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다. 돈벌이로 바빴던 제2기 인생 중 꼭 하고 싶었거나 못했던 일, 마저 끝내지 못한 일, 평소 은퇴 후 이루고자 했던 일들을 성취해 내는 자기 성장과 자아실현의 시기다.
몇 년 전 고령화 사회와 관련, 인터넷에서 나도는 노인(老人)에 대한 몇 가지 유머러스하면서도 유의미한 정의가 있었다. 여러분은 어떤 타입을 기대하는가.
● No人=‘사람이 아님’. 반사회적 행동과 언행으로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노인.
● 怒人=‘화만 내는 사람’. 권위와 자기 주장만 앞세우는 고집불통 영감.
● 勞人=‘노력하는 사람’. 나이 먹고도 공부하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어른.
● 露人=‘베푸는 사람’. 여기서 ‘노(盧)’는 이슬이라는 뜻 외에 ‘은혜를 베풀다’는 의미로 평생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하고 빈손으로 떠나시는 분.
베푸는 삶이라고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받는 것이 더 많을 수 있다.
첫째, 베푸는 내 자신이 즐겁고 행복하다.
‘친절을 베푸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삶에 고도의 정신적 만족감과 행복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안정감과 도덕적 확신을 준다. 내 내면 속의 불안과 쫓기는 심리가 자선과 친절의 실천으로 말미암아 숨을 죽이거나 사라져 버린다.
미국 미시간대 스테파니 브라운(Stephanie Brown) 박사는 423쌍의 노인 부부를 5년간 조사한 결과 ‘자기만 아끼고 남을 돕지 않는 사람’이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보다 일찍 죽을 가능성이 2배나 높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134명이 사망했는데, 생존자 중에서 여성의 72%, 남성의 75%가 조사 전년도에 대가 없이 남을 도와준 것으로 나타났다. 브라운 박사는 이 점에 주목하고 “장수 비결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둘째, 베풀면 상대방으로부터 되돌려 받는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베푼 작은 성의에 대해 상대방으로부터 감사와 호의를 받은 경험이 종종 있다. 나는 과거 회사 다닐 때 추석과 연말이 되면 회사 건물의 경비원들에게 아주 작은 성의 표시를 했다. 이후 경비원들의 마음 씀씀이와 대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들은 진정 고마워했고 항상 내게 잘해주려고 노력한다. 나는 매일 건물을 출입할 때 마다 그들의 호의를 접한다. 이쯤 되면 내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받는 상황이 됐다. 인생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내 동창생 하나는 사업이 번창하던 시절, 실직한 친구를 자발적으로 도와 준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후 사업의 실패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창생을 현재 도와주고 있는 이가 그 친구다. 돌고 도는 인생 속에서 베푸는 행위는 어쩌면 인생의 보험과 같다.
셋째, 나의 베푸는 행위는 상대방의 또 다른 베풂을 유도함으로써 베풂의 선순환을 이루게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 사는 사회다. 나의 선행이 타인의 또 다른 선행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도덕적 희열과 세상살이의 즐거움을 느낀다. 우리의 작은 선(善)이 소박하게나마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다. <계속>
일흔한번째 기억하기
친절을 베푸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자신의 삶에 고도의 정신적 만족감과 행복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