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명상할 때 자주 “나는 누구인가?" 하는 명제를 깊이 들여다본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주제는 죽을 때까지 탐구해봐야 하는 화두(話頭)이다. 이때 나는 가끔 심리학자들의 도움을 받곤 한다.
분석심리학자인 카를 융(Carl G. Jung)의 이론 중에 페르소나(persona)와 그림자(shadow)라는 이론이 있는데, 이 용어들을 살펴보면 자신의 참 모습을 성찰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페르소나는 그리스인들이 연극을 할 때 자기가 맡은 역할의 가면을 쓰고 연극을 했는데, 이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부른다. 융은,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리스인들이 연극을 할 때 썼던 가면처럼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직함에 맞는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하여 인간이 쓰는 가식의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점차 나와 나 아닌 것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키워간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 다른 것에 접근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는데, 그 다른 것에 접근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인격 혹은 성격이 곧 페르소나이다.
아이들은 어떤 종류의 행동양식, 예를 들면, 웃거나 귀여운 짓 등은 다른 종류의 행동양식, 즉 오줌을 싸거나 떼를 쓰는 등의 행동보다 더 보상을 받는 행동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면서 우리 성격의 한 부분이 형성된다.
따라서 어른도 그렇지만 특히 발달과정에 있는 아이들은 다른 사람이 용납하고,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는 행동을 하려고 한다. 비록 그 행동이 자신이 원하는 행동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인정과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그런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성격, 즉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위해 ‘나’가 ‘타인’에 대해 갖는 성격화된 ‘나’가 곧 페르소나인 것이다.
우리는 외부 세계가 나에게서 원하는바 그러한 나의 페르소나를 제시해야 한다. 외부의 대상이 바뀌면 나의 페르소나 또한 바뀌는 것이며, 이런 일은 하루에도 여러 번 일어날 수 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잘못이며 화를 낼 때는 나쁜 아이라고 배운다면, 자신의 자연적 감정인 분노를 완전히 가면 밑에 숨기는 내면화 성격을 발달시킬 수 있다. 분노를 느낄 때 그는 이마를 찌푸리는 대신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
영성이 성숙하여 분노를 느낄 때 화를 내는 대신 화를 해소하여 미소를 짓는다면 이는 매우 건강한 것이지만, 타당한 욕망을 가면 밑으로 감추는 미소는 매우 위험하고도 불건강한 것이다.
어느 정도의 페르소나는 사회생활에서 피할 수도 없고, 또 순기능도 가지고 있다. 문제는 페르소나가 심각한 위선과 병리현상을 동반하여 자신과 타인에게 독이 되는 경우이다.
엄격한 부모나 힘이 센 주위 사람들의 강한 명령을 거절하지 못하고 따를 때, 혹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상대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욕구에 반(反)하여 말하거나 행동할 때 사람은 자신의 자존감에 조금씩 상처를 받게 된다. 이러한 상처받은 자존감은 자신의 무의식에 그림자를 만들게 된다.
그림자(shadow)는 페르소나의 정반대 현상이다. 그림자는 원시적이고 본능적이며 동물적인 존재와 같다. 그림자는 인간이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그 모든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인간이 원하면서도 감히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우리는 소위 성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이 그림자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커다란 오해이다. 성자나 현자에게조차도 그림자라고 부르는 야만성과 상처받은 자존감은 무의식 속에 억압된 채 여전히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그림자의 크기나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림자의 크기나 강도는 대체로 그 사람의 성장 체험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환경이 넓고 개방적일수록 그림자는 작고, 환경이 좁고 폐쇄적일수록 그림자는 크다. 성직자나 명상을 오래 수련한 사람도 어릴 적 환경이 좁고 폐쇄적이었다면, 그의 그림자는 대체로 큰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그림자를 줄이고 대자유인이 되고 싶다면, 명상을 수련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그 명상은 반드시 바른 명상이어야 한다.
넓고 개방적인 환경이란 수용적이고, 개방적이며, 사랑과 동정심이 있으며, 비율법적이고, 자존감이 높으면서 여유가 있는 환경이다. 좁고 폐쇄적인 환경은 생각과 말과 행동은 거부되고 억압된다. 그러므로 이런 환경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 사회적 승인 등이 매우 필요하여 페르소나를 발달시킨다. 과도한 페르소나는 인간의 무의식에 그림자를 만든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근본주의적 내지 교조주의적 종교 집단에서, 공산주의 집단에서, 독재정권 하에서 그리고 지나치게 엄격한 부모가 군림하는 가정에서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 이런 환경에서는 역동성이 또한 부족하므로 이런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체험이 종종 율법적 경건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그림자를 회피하지 말고 만나야 하며, 그림자가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참된 깨달음을 얻은 현자들의 가르침은 전인성(wholeness)을 지향하고 있다. 전인성은 나 자신의 밝은 면과 마찬가지로, 나의 어두운 면인 그림자까지도 자아의 일부로 나의 의식 속에서 통합한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그림자도 수용하고 포용하며 통합하는 관대함을 가지게 된다.
만일 우리가 진지하게 우리 자신의 페르소나와 그림자를 바라보고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명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보다 온전하고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