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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연재 | 산중일기

두 모녀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아이

최찬희 작가  20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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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내가 다니던 파주의 작은 시골 초등학교 3학년 교실의 풍경은 늘 먼지가 풀풀 날리고 번잡스러웠던 것 같다. 남자애들은 겨우내 땅바닥이 닳도록 패대기치던 딱지를 교실에서도 여전히 내리치고 있었다.

그날은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오시는 담임 선생님의 표정이 다른 날과는 달랐다. 

“조용! 조용! 오늘은 너희들에게 새 친구를 소개하겠다."

소란을 피우다가 후다닥 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일제히 문 쪽을 바라보았다. 교실로 들어서는 새 친구의 모습은 시골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차림새를 한 여자아이였다. 

반지르르하게 땋은 머리를 양쪽으로 길게 내리고 북청색 바바리코트 속으로는 흰 블라우스의 레이스가 눈부셨다. 마치 동화 속 주인공 같은 첫인상이었다. 그 아이 엄마도 허리를 단정하게 묶은 베이지색 바바리코트 차림이었다. 두 사람은 어쩐지 우리와는 다른,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돋보였다. 그 애를 선생님은 나와 짝지어 주셨다.

새로운 친구의 등장으로 어색해하며 잠깐 조심스러워지는듯하던 교실 분위기는 곧 예전의 그 번잡스러운 사내아이들의 장난으로 어수선한 일상이 되었다. 그 속에서 워낙 조용하고 차분하던 그 아이가 어느 토요일 하굣길에 자기네 집에서 숙제를 같이하자며 내 손을 잡았다. 영애와 짝이 된 뒤에도 나는 계속 다른 아이들과 다녔다. 흙장난으로 겨울이면 늘 손 등이 터서 갈라진 우리와는 달리 고운 손과 얼굴에 목소리까지 귀티가 나는 그 아이와 선뜻 친해지지 않았을 때였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고운 얼굴과 상냥한 서울 말씨의 그 아이를 흠뻑 좋아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부러웠던 것은 삼단같이 검게 윤기 나는 그 애의 긴 머리였다. 동네에 유일한 이발소 의자에 나무판자를 걸치고 올라앉아서 깎은 상고머리였던 내가 갖지 못한 것이다. 

허리 아래까지 늘어진 그 아이의 땋아 내린 가랑머리는 지나가는 낯선 아주머니들까지도 한마디 할 정도로 굵고 탐스러웠다. 그 긴 머리는 마치 삼손의 머리칼처럼 신비한 힘이 느껴졌다. 탐스러운 그 머리를 만질 때마다 나는 웬일인지 그네 엄마가 생각났다. 아침마다 길게 풀어헤친 영애의 머리를 빗어 정성껏 땋아주는 손길이 떠올랐다. 어쩌면 동화 속에 나오는 고운 선녀를 보는 것 같은 상상이었다.

영애의 집은 작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 시멘트로 메운 좁은 골목 같은 마당을 지나야 한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에 방 두 개를 연결한 툇마루가 있다. 넓은 마당에 대청마루가 있는 우리 집보다 작은 집이어서 속으로 좀 의아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에 들어가서 우리는 방바닥에 엎드려서 숙제를 하면서도 영애가 준 미제 과자 그릇에 자꾸 손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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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 '티끌모아 태산' 캡쳐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옆 방이 궁금했다. 그러다 전화벨이 울리자 영애는 엄마다! 하면서 그 방으로 후다닥 뛰어가 전화를 받았다. 툇마루를 지나 열린 방문 안으로 그동안 만화에서만 보았던 화려한 침대가 보였다. 넓은 침대에 앉아서 엄마의 전화를 받는 그 아이를 보니 갑자기 그녀가 범접할 수 없이 기품 있는 아이처럼 돋보였다. 

호기심에 소외감까지 든 내게 그 아이는 엄마 방에서 놀자며 들어오라고 했다. 선녀같이 곱게 보였던 그네 엄마의 첫인상 때문이었을까? 좁은 방이지만 잠자리 날개 같은 휘장이 늘어진 침대는 동화 속처럼 아름다웠다. 우리 엄마의 조그만 화장 바구니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화려함, 금장으로 장식된 소파가 꼭 들어찬 방은 나의 어린 눈을 휘황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하던 숙제도 내팽개치고 푹신한 침대 위를 구르며 인형 놀이를 하다가 어느새 곤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처음 느껴보는 냄새였다. 역한 노린내와 쉰내같이 확, 풍겨오는 냄새였다.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같은 어지러움에 눈을 떴다. 부리부리한 눈을 번쩍이며 이빨이 유난히 흰 흑인 병사가 나를 들어 옆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나는 선잠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와중에도 놀라움으로 숨이 탁, 막혔다. 뒤이어 영애 엄마가 딸을 안고 왔다. 그리곤 두 사람은 옆방으로 들어갔다. 

엉겁결에 깨어난 잠결에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어쩌다가 여기서 잠들었는지 생각을 더듬느라 벌어진 동공이 점점 더 커졌다. 엄마가 기다릴 텐데, 집에 가야 하는데… 옆에 있는 영애는 뒤척임도 없이 잠에 떨어져 있다. 달빛이 어슴푸레 비치는 창호지 문은 우리 집 방문 같아서 바라만 봐도 서러워 자꾸만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눈을 꼭 감았다. 가슴을 콩닥거리는 알지 못할 두려움은, 어떤 복잡하고도 분명치 못한 감정과 섞여 한밤중 내내 꿈속까지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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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에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딸을 보고도 엄마는 놀라움과 걱정스러움도 없이 쌀을 씻고 계셨다. 언제나 푸근하고 담담했던 모습 그대로. 친구네 간다고 했으니 거기서 자려니 하신 모양이다. 나는 엄마에게 무엇인가 크게 소리치고 싶은 말이 커다란 벽처럼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들어와 언니 옆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뭔지 모를, 어젯밤 내내 가슴을 콩닥거리게 했던 그 놀라움과 두려움이 다시 이어졌다. 

밥 먹고 계속 낮잠을 자고 있던 나를 엄마가 깨웠다. 밖에는 다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엄마는 정신 차리고 요강에 오줌을 누라고 하더니 그 속에다 내 손을 잡아당겼다. 우리 다섯 형제들이 매일 밤 강제로 하는 튼 손 치료법이었다. 벌겋게 튼 손등이 쓰리고 따가웠다. 킹킹거리며 싫다고 하니 가만히 있으라고 하며 엄마가 내 잔등을 때린다. 어젯밤부터 줄곧 나를 옥죄었던 감정이 목 안으로 차오르더니 기운 없이 내리깐 눈 밑으로 무너져 내리듯 쏟아졌다.

나는 다음 날 등교하지 못했다. 어쩌면 학교에 가서 그 아이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흘 만에 가 본 교실은 내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영애는 용주골에 있는 학교로 전학 갔다고 한다. 그날 나와 마주친 영애 엄마의 술 취한 눈길과 영애의 조용한 얼굴이 겹치듯 떠올랐다. 용주골에 가면 볼 수 있는, 미군 병사들과 같이 걸어가던 여자들을 떠올렸다. 영애를 만나면 친구들한테 그날의 일은 절대 이야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아무에게도, 우리 엄마한테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날, 그 아이와 숙제만 하고 집으로 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도 가슴에 찍힌 그때의 충격을 생각하면 여전히 어린, 그때의 내가 되어 아프다. 현실이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그 아이의 영혼은 순진무구하게 행복하였길 바라는 나의 마음은 안타까운 무지일까. 그 놀람과 두근거림 속의 밤에도 곤히 자고 있던 그 아이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던 말은 지금도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글ㅣ 최찬희
중앙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문학마을> 수필 등단하여 한국문인협회, 중앙대문인회 회원, 이음새문학회 회원(2대 회장 역임)으로 활동 중이다. chanhi165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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