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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금 연재 | 시베리아 유랑기 (4)

신을 섬기는 노래와 춤 그리고 제사

샤먼의 발상지 알혼섬

송종찬 시인  202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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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혼섬의 신목

 아침부터 짙은 안개비가 뿌렸다. 샤먼의 성소로 알려진 알혼섬은 쉽게 이방인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구름이 낮게 깔리고 9월초인데도 전날 25도까지 올랐던 기온이 3도까지 떨어졌다. 관제탑의 이륙 허가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허가가 나지 않았다. 

바이칼을 아예 못 볼지 몰라 한 시간 정도 차를 몰아 바이칼의 끝자락인 리스트비얀카Listvyanka로 갔다. 길가에는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일렬종대로 사열하듯 서 있었다. 운전기사에게 시베리아 나무들은 왜 키가 같은지 물어보았다. 기사는 엷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서로 키를 맞춰 살아간다고 설명했다. 누가 전정가위를 들이댄 것도 아닐 텐데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나무들은 어깨를 맞춰 서 있었다.

리스트비얀카는 안가라 강물이 시작되는 지점의 마을이었다. 바이칼에서 빠져나온 안가라강은 시베리아 북부의 예니세이강과 합류해 북극까지 흘러갔다. 강의 초입에 샤먼 바위가 있고, 강 건너편으로 바이칼을 끼고 도는 환바이칼 철도와 간이역이 눈에 들어왔다.

선상에서 바이칼 생선인 오물을 안주 삼아 보드카를 마시고 있는데 날이 개면서 비행 허가가 떨어졌다. 서둘러 헬기장으로 갔다. 러시아 부호의 한 사람인 데리파스카 회장이 우정의 표시로 자신의 전용헬기를 내주었다. 하늘에서 본 바이칼은 기대한 만큼 아름다웠을까. 육지에서 볼 때와 마찬가지로 바이칼 호수는 평범했다. 강의 표정이 다양할 리 없고, 깊은 강물 속을 들여다 볼 수도 없었다. 보드카 때문인지 일행들이 잠시 창밖을 보다가 졸고 있는데 서울에서 온 한 사람만이 잠들지 못한 채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호수가 아닌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진주빛 바이칼호 위를 날아 한 시간쯤 갔을 때 낮은 구릉과 초목지대가 어우러진 알혼섬이 나왔다. 구릉 아래서 야생화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알혼섬에서 하룻밤 자고 나면 들풀의 영향으로 두통이 사라진다고 했다. 조랑말들이 풀을 뜯고 있는 초지를 가로질러 샤먼의 발상지인 부르한 바위로 갔다. 브랴트인이 촛불을 밝혀놓고 밤새워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 문명과 떨어진 섬에서 신을 섬기는 노래와 춤 그리고 제의(祭儀)는 일종의 놀이였다. 그들은 죽은 자를 섬기지 않고 사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바이칼 브리야트족 (1).jpg
바이칼 브리야트족

 부르한 바위에 올라 바라본 바이칼은 바다였다. 브랴트인들은 바이칼을 호수가 아니라 모레(Mope) 즉, 바다로 불렀다. 바위 아래서는 파도가 세차게 치고 있었다. 수천년 씻기고 다듬어진 조약돌 하나를 주워 슬그머니 주머니 속에 넣었다. 오색 천이 휘감긴 신목 앞에 서서 소원을 빈 후 주머니 속 조약돌을 만져보니 싸늘히 식어 있었다.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조약돌은 바이칼이 낳고 기른 자식인데, 집에 가져다 놓으면 부정을 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잠깐 바이칼은 내려놓는 곳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바이칼에서는 사랑도 절망도 내려놓아야 하는데 나는 무엇을 찾고 구하려 했었다. 

돌아오는 헬기 안에서 바이칼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호수가 거대한 신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눈에 보이는 호수는 내가 찾고 있던 바이칼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칼은 정령의 숲에나 존재하는 전설의 호수일 뿐, 나는 바이칼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싶은 이는 바이칼에 가면 안 된다. 사랑을 구하려는 이는 바이칼에 가면 안 된다. 내가 본 바이칼은 유정(有情)이 아니라 무정(無情)이었다.


#시베리아의 들꽃

누가 사랑을 물어온다면

시베리아로 가 반란처럼 피어난

엉겅퀴 한 송이 보여 주리


벌판에 열 달 내내 눈 쌓이고

자작나무 숲에 안개가 덮여도

원색의 야생화는 피어난다


유형의 길을 가던 님 따르다

눈밭에 나뒹굴던 여인처럼

길가에 맨발로 피어난 들꽃


여름은 짧고 길은 어두워도

그대에게 가야만 하는 길

사랑은 들꽃처럼 붉어지고


누가 사랑을 물어온다면

그냥 시베리아로 달려가

엉겅퀴 한 송이 물들여 주리

글ㅣ 송종찬
고려대학교에서 러시아문학을, 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전공했다. 1993년 <시문학>에 ‘내가 사랑한 겨울나무’외 9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 시집 ‘그리운 막차’ ‘손끝으로 달을 만지다’ ‘첫눈은 혁명처럼’ , 산문집으로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 이 있다. 2011년부터 4년여 동안 러시아 체류하며 외국문학도서관 부설 루도미노출판사에서 러시아어시집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Транссибирские Ночи) 을 출간했고, 루스키미르재단의 초청작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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