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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중 교수의 음식예찬 12

불륜 현장에 등장하는 수박과 철갑상어

체호프 단편의 음식코드

러시아 최대 단편 작가이자 극작가인 체호프(1860~1904) 역시 ‘범속한’ 일상의 모습을 전달하는데 빈번히 ‘음식 코드’에 의존했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음식, 식사, 차 마시기 등의 얘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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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음식에 대한 체호프의 기호는 상식적이었다. 적당히 즐기고 절제할 줄 알았고 스스로 요리를 하기도 했다. 그는 채소와 육류를 골고루 먹었지만 특히 버섯을 아주 좋아해서 버섯을 따기 위해 며칠씩 숲속을 헤매고 다니기까지 했다. 

체호프의 단편 소설 <국어 선생,1894>의 음식 코드는 ‘샤워크림’이다.

샤워크림은 러시아 요리 어디에나 사용되는 만능 양념이다.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이 시큼털털한 맛의 걸쭉한 크림은 야채 수프, 고기 수프, 샐러드에도 들어가고 만두, 팬케이크, 디저트 케이크 위에도 얹어진다. 한국인들에겐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과 같은 의미라고 보면 된다. 

<국어 선생>은 중학교 국어교사인 주인공 니키틴을 통해 지방 소도시의 지루한 일상성은 물론 인생의 범속성을 보여준다. 니키틴의 꿈은 지방 유지의 딸 마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인데 막상 살아보니까, 결혼하면 대부분 그러하듯, 그저 범속하고 평범한 일상성의 노예가 되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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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크림은 니키틴의 신혼생활부터 주요한 삶의 일상으로 나타난다. 매일매일 먹고, 또 만드는 이들 부부의 따분하고 지루한 삶을 대변하는 음식코드다. 

체호프의 단편 중에 가장 우수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1899>에서 등장하는 음식코드는 수박과 철갑상어다.   

이 소설은 당시 러시아 중산층이 즐겨 찾던 휴양지 얄타에서 만난 두 남녀의 불륜 스토리다. 애정없는 결혼 생활을 하던 정숙한 유부녀 안나는 홀로 휴양지를 찾았다가 바람둥이 유부남 구로프를 만나 애정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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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불륜 장소인 안나의 호텔 방에 수박이 등장한다. 처음 정사를 치르기 전 어색한 시간에 말이다.

호텔 방의 테이블 위에는 수박이 놓여 있었다. 구로프는 한 조각을 잘라서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반시간 이상이 지났다.

하고 많은 과일 중에서 하필 수박인가. 남녀의 로맨스를 위한 소도구로서의 과일이라면 색깔과 모양이 예쁜 체리, 딸기, 포도 등 많은데 하필 물이 뚝뚝 흐르고 씨를 툭툭 뱉어가며 먹어야 하는 과일이 등장하는가. 더구나 수박은 얄타 지방에서 가장 흔하고 쓴 과일이다. 

결국 작가는 평범한 불륜 커플의 그렇고 그런 싸구려 로맨스의 메타포( metaphor · 은유)로 수박을 등장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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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후반부에는 ‘철갑상어’가 등장한다. 철갑상어는 고급스러운 음식의 대명사인데 왜 등장하는가. 

스토리를 보면 싸구려 불륜 연애를 마친 두 사람은 각자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바람둥이 구로프 마음에 이상한 일이 생긴다. 안나가 그리워지며 ‘진정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모스크바의 동료 한 사람이 ‘맛이 약간 간 철갑상어’ 이야기를 꺼낸다. 

이 철갑상어 이야기 역시 작가가 암시하는 음식코드다. ‘막이 약간 간 철갑상어’는 상등품은 아닌 것 같고, 구로프가 속한 세계의 적당히 통속적이고 적당히 타락한 분위기를 상징하는 것이다. 얄타에서 먹었던 수박의 모스크바 버전이라고 할까.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싸구려 모텔에서 밀회를 거듭한다. 이때 ‘냄새나는 철갑상어, 망가진 잉크스탠드, 회색 모포가 덮인 싸구려 침대, 이류급 바이올린 주자’등이 등장하며 이들의 삶과 로맨스의 범속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 출처: 석영중 교수 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예담, 2013)’

글ㅣ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며 고려대 중앙도서관장을 겸하고 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연의 연구, 교수 활동은 물론 강연, 집필, 방송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2000년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슈킨 메달을 받았고 제 40회 백상출판번역상을 수상했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한국슬라브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뇌를 훔친 소설가>, <러시아 시의 리듬>, <러시아 현대 시학>, <러시아 정교>, <석교수의 청소년을 위한 번역 교실>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뿌쉬낀 문학작품집>, <분신>, <가난한 사람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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