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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막 잘살기 (44)

“우리는 누구나 집에 오면 아버지가 된다”

난로에 불 피우고 그네 못박는...

그 즈음에 나는 지휘자 정명훈씨와 만나게 됐다. 잡지사에 쓰는 연재물 인터뷰 차원에서였다. 당시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이끄는 정씨는 세계적인 지휘자다. 누나 정명화씨(첼리스트), 정경화씨(바이올리니스트)와 ‘정 트리오’로도 활동하는 우리나라 명문 음악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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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 트리오 삼 남매 / 조선일보

 2005년, 정씨와 3박4일간 일본 여행을 함께 했다. 여행 기간 동안 그의 가족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터득했다. 정씨의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가족에 대해 “기적"이란 표현을 썼다. 아내에 대한 찬사가 끝이 없었다. 정씨에게선 진실성이 느껴졌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내가 위대한 음악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장한 아버지상’ 내지는 ‘장한 남편상’을 수상한 가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슬하에 진?선?민이란 아들 삼형제를 두고 있다. 그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해서 요리책도 냈다. 주로 서양요리로 샐러드, 스프, 파스타를 소개했다. 자신과 자신의 아내, 그리고 세 아들과 그들의 반려자와 함께 할 식탁을 꿈꾸며 썼다는 요리책 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기적!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대할 때마다 나는 이들이 내 인생의 기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우리 가족이 특별히 잘나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내 삶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음악가라는 정체성도, 지휘자라는 사명감도 잠시 잊는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성실한 짐꾼으로, 충성스러운 요리사로 거듭난다. 그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Dinner for 8(여덟명을 위한 저녁 식사)’중에서>

 

서울로 돌아온 나는 그 책을 샀다. 그리고 따라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요즘 많이 먹는 스파게티 ‘알리오 올리오’. 마늘과 고추와 스파게티 면 중심으로 만드는 데 대단히 만들기 쉬웠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요리를 만들어 가족에게 선을 보였다. 내게 어떻게 이런 ‘변화’가 찾아왔을까.

일찍 집에 돌아올 때가 많아지다 보니 조금씩 가족들의 일상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됐다.

“승훈이는 오늘 늦게 오나?"

“예삐는 학원가는 날 아닌가?"

아이들의 일정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행동반경과 귀가 시간에 대해서도 파악이 됐다. 막내 딸은 중3이라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원에 다시 간다. 자정 넘어 학원이 끝나면 내가 차를 몰고 나가 데려오곤 했다. 전에는 모두 엄마 몫이었다.

자연히 서로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너는 어떤 고등학교를 원하니?"

“아빠. 나는 일본 만화를 좋아해서 일본어를 배울 수 있는 외고를 가고 싶어."

어느 날인가 집에 일찍 왔더니 딸아이가 피곤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잠든 얼굴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 친구들과 문제가 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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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있는 아빠가 되고 보니 아이들의 표정만 봐도 기쁜지 슬픈지, 힘든 일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딸 아이는 언제 깼는지 부스스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런 딸 아이를 보며 무심한 듯이 말을 걸었다.

“오늘 아빠 기분이 별로 좋지 않네."

“왜?"

띨이 심드렁하게 말을 받았다.

“응, 회사에 친한 친구가 있는데, 오늘 좀 내게 섭섭하게 해서."

꾸며낸 말이었는데, 반응은 즉각적으로 왔다.

“왜? 무슨 일 있었는데?"

“아니, 아빠가 요즘 국제문제를 놓고 좀 강하게 의견을 피력했더니, 그 친구가 계속 트집을 잡기에 내가 가만있으라고 윽박질렀어. 그랬더니 무척 기분 나빠하더구먼."

딸은 생각에 빠진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아마 자기 케이스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무심한 것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찬찬히 생각해 보니까, 내 잘못이 더 많은 것 같아."

“왜?"

그 내용이 무척 궁금한 지 딸이 재빨리 물었다.

“응…, 왜냐하면 내가 너무 단정적으로 내 의견을 밀어붙였어. 알다시피 누구나 각자 의견이 있는 것 아니니? 그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그런데 내가 너무 내 주장을 내세우고 또 말하는 태도도 ‘단정적’이니 상대방이 못마땅해 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그 친구가 좀 반박을 한 것인데, 내가 또 심하게 나무랐으니…. 아빠가 잘못한 것 같아.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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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성격을 알고 있다. 부전여전(父傳女傳)이라고 나와 성격이 비슷했다. 적극적이며 호불호가 분명하다. 따뜻한 성품이지만 주견이 뚜렷하고 거침이 없어 상대방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아프게 할 수 있다. 특히 예민한 사춘기에 또래 아이들과 마찰이 자주 빚어질 수 있는 성격이다. 그래서 오늘 아마 친구들과 다투고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그런 문제에 대해 정색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딸아이는 도리어 당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색을 하지 않고 마치 내가 겪고 있는 이야기인양 꾸며서 들려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딸아이는 자기가 겪는 갈등과 비슷한 일을 아빠가 겪고 있다는 점을 알고 그 해결책을 자연스럽게 찾게 될 것이다.

얼마 후 딸이 내게 문자를 보냈다. 역시 내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아빠, 마음이 편해졌어. 너무 감사하구. 이제 애들한테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고 나부터 바꿔 보려구!"

마치 내 일이 해결이 된 듯 기뻤다. 그리고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준 딸의 마음이 전해져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래, 이게 가족이지!’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김현승의 시 ‘아버지의 마음’ 중에서>

 

마흔네번째 기억하기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글ㅣ 함영준
22년간 신문 기자로 일했다. 스스로 신문사를 그만둔 뒤 글을 썼고 이후 청와대 비서관 등 공직 생활도 지냈다. 평소 인간의 본성, 마음, 심리학, 뇌과학, 명상 등에 관심이 많았으며 마음건강 종합 온라인매체인 마음건강 ‘길’(mindgil.com)을 2019년 창간해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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