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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막 잘살기 (36)

어린이날 선생님께 받은 동화책 2권…

저널리스트 길로 이끌어준 박광자 선생님

햇살이 따사로운 초봄 대낮이다. 점심을 마치고 여유롭게 태평로 길을 걷고 있었다. 거리는 행인들로 북적댔다. 동아일보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저 만치 50대 중년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갈색 코트를 입고 160㎝ 아담한 키에 단발머리. 아!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이다. 내 머리 속 해마가 분주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좁혀져 3~4미터 앞까지 왔다. 흰 피부에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온 갸름한 얼굴에 큰 눈망울. 

그래! 박광자 선생님. 그 분 같다. 나이가 드시면 저런 모습일 거야. 근데 몇십 년 만이지? 그 분 연세가 이제 칠순 다 됐을텐데 저 분은 50대… 아냐, 요즘 워낙 미용술이 좋잖아.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녀는 이미 나를 지나쳐 지나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뒤로 돌아 뛰어갔다.

“저! 여보세요…"

그녀는 중년남자가 큰 소리로 부르며 앞을 가로막자 당황한 듯 그 큰 눈이 더 커졌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박광자 선생님 아니세요?"

“…아닌데요…"

그녀의 어조에는 경계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제 어릴 때 담임선생님과 너무 닮으셔서 착각했네요."

‘담임선생님’이란 단어에 그제사 그녀 입꼬리에 미소가 떠올랐다. 돌아서 사무실로 향하면서 내 머릿속은 수십년전 그 날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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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 잠깐 나 좀 보고 가."

박광자 선생님이 교실을 나서려는 나를 조용히 불러 세웠다. 서울 삼광초등학교 3학년 6반. 교실에는 담임인 박선생님과 나 둘만 남았다. 1965년 5월5일. 어린이날이라 전교생이 남산 공원에서 야외 학습을 마치고 일찍 수업이 끝났다.

선생님과 단 둘이는 처음이라 무척 겸연쩍었다. 그땐 선생님이 하늘 같은 존재였다. 난 작년에 부임한 20대 초반 이 예쁜 선생님이 담임이 되길 학수고대했고 마침내 실현됐다. 그런데 나만 부르시다니….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오늘이 어린이 날인데 무슨 좋은 일 있니?"

선생님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상냥하게 물으셨다. 내게 특별한 일이 있을 게 없다.  

“…아뇨. 별로…"

선생님이 다시 물으셨다.

“너 가지고 싶은 게 뭐니?"    

 

허, 생각이 막혔다. 떠오르는 게 없다. 생활 형편상 뭐 사달라고 조를 형편이 아닌데다 뭔가를 간절히 원해본 것도 없다. 그때 답답했던 어린 내 마음이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당시 어린이 신문에 난 ‘내가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하늘’, ‘바다’, ‘해’ 등 폼 나는 단어에서부터 ‘카메라’ ‘자전거’ ‘시계’ ‘야구글러브’ ‘하모니카’ 등등 구체적 물건에 이르기까지  많았는데 난 생각조차 안해 보다니…. 

물끄러미 창 밖을 보다가(신록의 계절 5월인데도 날씨가 흐렸다) 기껏 생각해 낸 것이 “동화책"이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얼굴에 활짝 웃음을 지으며 책상 서랍에서 예쁜 겉표지의 동화책 2권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야. 내가 딱 맞췄네. 영준이가 좋아하는 걸. 자 여기…. 이건 선생님이 네게 주는 어린이날 선물이야. 재미있게 읽어. 그리고 앞으로 책을 많이 봐. 그래야 커서 훌륭한 사람 된단다." 

거의 50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에도 난 그날 광경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그날을 계기로 내 인생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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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난 만화책을 집어던지고 선생님이 주신 동화책 2권을 읽고 또 읽었다. 이솝우화, 구미각국 동화를 요약 편집한 책들인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다 읽고 나면 맨 뒷장 여백에 선생님이 예쁜 펜글씨로 쓰신 글을 보고 또 보았다. 왜 볼 때 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아랫배가 든든해질까.  

 

 사랑하는 영준아. 할아버지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커서 훌륭한 사람 되어라. 

 너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선생님이… 

 

나는 아버지 어머니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형제도 없었다. 그래서 활기차지 못했고 늘 외로웠다. 혼자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다. 그런데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웅크려있던 마음이 열리고 회색빛 세계가 청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분이 바로 선생님이란 사실에 학교 가는 것도 즐거워졌다.

이후 선생님은 항상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경기도 광릉, 덕수궁, 서대문극장, 화신 앞 놀이공원, 창경원, 남산 야외음악당, 동작동 국립묘지…. 또 중국집, 양식집, 한식집, 일식집 등에서 맛있는 음식도 많이 사주셨다. 선생님은 또 대개 부유한 집 아이들이 맡은 학급회장에 나를 임명해 주시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박선생님이 사주신 동화책 2권 덕분에 독서를 시작했다. 이후 공부는 게을리해도 책은 꽤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결국 글 쓰는 저널리스트의 길을 걷게 됐다. 

훗날 선생님을 수소문해 찾아 뵙고 그 때 선물에 대해 여쭤보았다. 선생님은 잘 기억하지 못하셨다. 그저 여러 제자에게 베푼 배려의 일부였다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평생 인생이란 항해를 환히 비쳐주는 등대가 됐다. 지금 이렇게 책을 쓰게 된 연원을 추적해 보면 결국 그때 선생님이 주신 동화책 두 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겠는가.

 

서른 여섯번째 기억하기

사소한 배려도 어떤 이에게는 평생 길을 비쳐주는 등대가 된다. 

 

글ㅣ 함영준
22년간 신문 기자로 일했다. 스스로 신문사를 그만둔 뒤 글을 썼고 이후 청와대 비서관 등 공직 생활도 지냈다. 평소 인간의 본성, 마음, 심리학, 뇌과학, 명상 등에 관심이 많았으며 마음건강 종합 온라인매체인 마음건강 ‘길’(mindgil.com)을 2019년 창간해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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