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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막 잘살기 (15)

누구의 아련한 뒷모습을 떠올릴 때 우린 행복해진다

‘행복한 그리움’의 포로가 될 때 기억해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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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돌이켜 보면 누구나 기억나는 행복한 시간들이 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스해지거나 저릿저릿해지면서 당장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그런 추억들의 시간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일이다. 나는 신문사로부터 ‘나 홀로’ 미국 워싱턴 D.C. 연수특파원 발령을 받았다. 서울에 있을 때도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적었는데 해외생활로 또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니…. 당시 우리 큰 놈(아들)이 8살, 작은 놈(딸)이 4살로 한창 재롱을 피울 때였다.

그해 봄 난 워싱턴으로 떠났다. 시내 한복판 조지 타운대 근처 단독주택에서 방 한개를 빌려 지내고 있을 때 여름방학을 맞아 가족들이 찾아 왔다. 

우리 네 식구는 며칠 시내 관광을 한 뒤 의식주에 필요한 물품을 잔뜩 싣고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 워싱턴을 출발해 한국으로 따지면 경부고속도로격인 I-95을 따라 뉴욕, 코넥티컷, 매사츄세츠, 메인주 등 동북부 지방을 여행하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캐나다 퀘벡, 몬트리올, 토론토를 거쳐 그 유명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지나  돌아오는, 수천㎞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온 가족이 24시간 붙어 다니면서 한 달 넘게 지내긴 내 생애 처음이었다. 매일 새로운 지역으로 여행하면서 갖가지 에피소드를 겪었다. 우리는 공동체로서 가족간의 사랑을 진하게 나눴고 평생 잊지못할, ‘마음 속의 보물’같은 추억들을 많이 간직하게 됐다.

드디어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가족들은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꿈 같던 워싱턴의 여름이 지나가는 것이다. 지금도 그날 광경이 눈에 선하다. 돌아가는 날 우리는 마지막 점심을 말없이 먹었다. 허탈하고 섭섭한 마음으로 짐을 싸고 공항에 나갔다. 

수속을 마치고 가족들이 출국장으로 나가려는 순간, 나는 왈칵 울음이 터져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이들은 아빠와의 헤어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내와 난 서글픈 미소와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세 식구가 연신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고…출국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뚫어지게 지켜봤다. 

그때 난 아내와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그들도 나처럼 헤어지는 걸 무척 슬퍼한다는 것을, 그동안 너무 행복하게 지낸 것을 고마워한다는 것을, 예전보다 훨씬 더 아빠를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사람의 뒷 모습이 앞 모습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그것도 정직하게 보여준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깨달았다. 

더불어 철없어 보이는 아이들도 어른처럼 자신들의 감정을 ‘위장’할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출국장에서 아이들은 내게 웃어 보였으나 그들의 뒷모습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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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물소리에게도 뒷모습이 있을까?

시드는 노루발풀꽃, 솔바람 소리.

찌르레기 울음 소리에도 뒷모습은 있을까? 

        <나태주의 시 ‘뒷모습’중 에서>

공항을 나와 주차장의 내 차로 들어간 나는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엉엉 울었다.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울면서 뿌듯했다.

우리 또래 이상의 남자들은 어려서부터 함부로 눈물을 보이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다. 유교주의와 마초이즘(Machoism: 남성우월주의)의 결합인데 늘 감정을 억눌렀고 괜히 초연한 척, 강한 척 했다. ‘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은사(恩賜)인가를 깨달은 것은 나이 오십이 넘어서였다. 

차를 몰고 돌아와 집 근처 아이들과 자주 찾았던 공원을 찾았다. 홀로 벤치에 앉아 또 울었다. 함께 뛰어다니던 정원, 함께 잡던 잠자리, 반딧불, 가든 스네이크(녹색의 작은 뱀) 등 모든 기억이 일시에 몰려나왔다. 

집에 돌아왔을 때 전화가 울렸다. 받아보니 아내였다. 뉴욕공항에 내려 서울행 비행기로 갈아타려는데 아이들이 아빠 보고 싶다고 울고 난리를 쳐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까불고 장난치던 그 놈들이…. 이어 아이들의 울음섞인 목소리

 

“아빠 보고 싶어…"

“우리 언제 또 봐?"

“나, 가기 싫어. 아빠랑 있고 싶어…" 

 

내 생애 그렇게 울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울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수십년간 헤어진 남북 이산가족 찾기도 아닌데 우리가 왜 쌩 난리지?’

그때는 내 인생의 가장 즐겁고 아름다웠던 시절중의 하나였다. 그날 이후로 난 다음해 3월 귀국할 때까지 ‘행복한 그리움’의 포로가 되었다. 내 방, 정원은 물론, 거리와 식당을 지날 때마다 가족들과의 추억을 음미했다. 

업무차 자주 워싱턴과 뉴욕을 오갈 때 마다, 우리 가족들이 여행할 때 ‘들렀던’ 곳에 들러,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 ‘시켰던’ 그 메뉴를 다시 시켰다. 자동차 안에서는 내가 몰래 녹음했던, 우리들의 대화가 담긴 카셋 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러면서 항상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미지는 워싱턴 내셔널공항(지금의 로널드 레이건 공항) 출국장에서 배웅할 때 지켜 본 가족들의 그 ‘아련한’ 뒷모습이었다. 


열다섯번째 기억하기

지나간 행복한 시간 회상해보기



글ㅣ 함영준
22년간 신문 기자로 일했다. 스스로 신문사를 그만둔 뒤 글을 썼고 이후 청와대 비서관 등 공직 생활도 지냈다. 평소 인간의 본성, 마음, 심리학, 뇌과학, 명상 등에 관심이 많았으며 마음건강 종합 온라인매체인 마음건강 ‘길’(mindgil.com)을 2019년 창간해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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