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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탐구

김정일 침실을 본 최초의 한국인

절제 없는 절대권력, 북한 최고 지도자의 민낯

김정일이 머물고 간 호텔방은 코냑, 와인 등 수십병의 술병이 말해주듯 마치 젊은이들이 한바탕 밤새 잘 놀다간 풍경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북한 최고지도자의 침실을 본 사람은 아마 내가 처음 아닌가. 그러나 매우 입맛이 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북한 김정일이 상하이에 갔다고 하네. 가줘야겠어."

“작년 5월인가요, 십몇 년 만에 중국을 깜짝 방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금 왜 또 갔죠?"

“나도 모르겠어. 김정일이 머무는 호텔 이름도 파악되지 않은 상태야."

2001년 1월 16일 저녁, 홍콩 특파원 사무실로 걸려온 본사 전화는 그렇게 짧게 끝났다. 김정일이 전년인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벌인 지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튿날인 17일 새벽, 나는 첫 비행기로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러나 CNN은 물론 미국과 한국 총영사관도 김정일의 동선動線에 대해선 깜깜 무소식이었다. 외교사절들이 묵는 시자오西郊 영빈관에 있다는 외신 보도에 달려가 보니, 이탈리아의 고위관리가 방금 공항으로 떠난 사실만 파악됐다. 

그날 밤늦게야 김정일의 숙소가 확인됐다. 상하이 신시가지인 푸둥浦東 서쪽 황푸강黃浦江 근처에 있는 국제컨벤션센터 내 둥팡빈장호텔東方賓江大酒店. 1998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묵은 최고급 호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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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새벽 6시쯤 나는 호텔로 향했다. 주변에는 이미 일본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현장에서 마주치는 일본 언론은 두 가지 특징을 보인다. 우선 중요한 취재다 싶으면 기자들을 대거 투입한다. 또 성실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현장을 지키라면 종일 한눈팔지 않고 ‘뻗치기’ 한다. 때문에 우리처럼 달랑 한 명이 취재하는 입장에선 일본 기자들을 사귀어 놓는 게 유리하다.

다행히 안면 있는 <아사히 신문>의 홍콩 지국장 우카이 사토시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정보를 공유하기로 하고 나는 호텔 쪽으로 접근했다. 예상대로 경비는 삼엄했다. 외부인은 일절 출입금지. 두리번거리다 보니 30대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 청소부가 눈에 띄었다. 손짓으로 불러내 근처 식당으로 데려갔다. 중국동포 안내인이 통역을 했다.

“나는 한국 기자인데 좀 도와주었으면 한다. 사례는 하겠다."

그는 선선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북한 측 인원은 100명을 넘었고, 총 14층(269실) 중 4개 층(5, 6, 9, 10)을 사용하며 나머지 10개 층은 중국 국가안전부(MSS) 요원들이 사용하거나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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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원들이 묵는 방은 미화 150달러짜리지만, 김정일의 방은 3,000달러인 10층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인 ‘총통방’. 목욕탕 3개, 회의장 1개, 침실 2개로 이뤄져 있다.

김정일이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여자들을 선호한다는 말을 듣고, 이 호텔 소유주인 진장錦江 그룹 회장이 직접 명령해 20세 이하 8명의 늘씬한 아가씨들을 엄선해 교대로 시중들게 했다는 것이다.  

김정일 일행은 당초 보도와 달리, 16일이 아닌 15일 오전에 도착했으며 베이징에서 내려온 중국의 ‘넘버 투’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극진한 안내 속에 푸둥 지역 반도체, IT 단지 등을 돌아보았다고 전했다. 또 공식 수행원으로 거명된 김용순(당 대남 담당 비서, 2003년 사망) 외에 북한 국가수반격인 김영남(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와 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중국 음식, 미국 스테이크 등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술은 마오타이주는 물론 프랑스나 1995년산 스페인 포도주 등 다 좋아했다. 물은 프랑스제 같은데 녹색병에…."

내가 ‘페리에Perrier’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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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모든 경비는 중국 측이 대고 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을 위한 전속 요리사, 여성 접대원들과 리무진 승용차, 고급 와인 등 물품 일체는 이 호텔 주인 진장 그룹에서 무상으로 지원하고 있다. 또 투숙비 등 기타 경비는 중앙 정부와 상하이 시가 나눠 부담하는 것으로 안다."

김정일 일행은 이튿날인 19일 낮, 푸둥의 창장張江 하이테크 파크를 방문하고 모처에서 장쩌민 주석과 다시 만났다. 이후 오후 7시쯤 보도진을 따돌리고 상하이역에서 열차로 베이징으로 떠났다. 

이튿날 새벽, 나는 눈을 뜨자마자 호텔로 달려갔다. 삼엄했던 경비는 풀렸다. 나는 호텔 안내 데스크로 가 점잖게 말했다.

“홍콩서 온 한국 사업가인데 귀빈 접대를 위해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을 예약할 생각이다. 우선 방을 직접 보았으면 좋겠다."

담당 직원은 순순히 나를 10층 김정일이 머물던 방으로 안내했다. 거실에는 청소부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김정일이 자던 침실로 들어가자, 황당한 풍경이 들어왔다. 이불은 제멋대로 구겨진 채 침대 한쪽에 놓여 있었고 시트도 흐트러져 있었다. 마치 젊은이들이 한바탕 밤새 놀다간 풍경이었다. 

방구석 이곳저곳에는 청소부들이 정리해놓은 수십 병의 빈 술병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여럿이 모여 술을 즐긴 듯 헤네시 XO 등 코냑과 이름 모를 프랑스산 고급 와인, 그리고 ‘정보원’ 말대로 스페인산 와인과 페리에 빈 병들이 즐비했다. 

이 방이 정녕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머물다간 방이란 말인가. 나는 여기서 북한이라는 나라의 국격國格을 떠올렸다. 최소한 밑에 비서들이라도 떠날 때 정돈은 하고 가는 게 예의 아니던가. 

내가 사진으로 담기 위해 카메라를 꺼내는 순간, 안내 직원이 촬영을 제지했다. 곧이어 그가 든 워키토키가 시끄러워졌다. 호텔 측에서 CCTV를 보고 내가 누구냐고 질문하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빠져나온 나는 비상구를 이용해 계단으로 내려와 호텔 밖으로 나왔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북한 최고 지도자의 침실을 본 사람은 아마 내가 처음인 듯싶었다. 그러나 왠지 입맛이 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날 오후, 역시 김정일을 취재했던 <로이터 통신>기자 티파니 우를 만나 상황을 복기復棋했다. 마치 한바탕 쇼를 본 느낌이었다. 외견상 그들의 행동은 일사불란했고 절도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김정일의 정돈되지 않은 침실 풍경처럼 혼돈mess과 애매모호함 자체였다. 왜 왔는지, 무엇을 했는지가 다 불분명했다. 그들이 진정 북한 인민을 구제하려고 중국식 개혁개방을 배우러 왔다면, 그렇게 매일 새벽까지 호텔 안에서 공짜 술과 음식에 취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나는 그들에게서 최고 지도자에 대한 면종복배面從腹背 외에는 일체의 규율(規律·discipline)과 도덕(道德·morals)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기사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이 끝난 이후 한국은 들뜬 분위기였다. 김정일은 ‘통 큰 지도자’요, 통일은 곧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게 일반적 정서였다. 우리는 쉽게 달아오르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여론이 한쪽으로 쏠리는 판에 내가 이런 내용을 보도한들, 과연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오히려 통일에 대한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떨까. 썼다고 해도 아무런 반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냄비근성처럼 이리저리 쏠리기 쉬우며, 어느 편에 서야 그쪽 편에 박수 받을 수 있다. 

그동안 북한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핵무기 만들고 기고만장하고 있다. 변한 것은 한국이다. 그저 북한의 심기 건드리지 않고 그 알량한 ‘평화’얻기 위해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이 민주, 자유, 인권, 정의, 복지인가?

글ㅣ 함영준
22년간 신문 기자로 일했다. 국내에서는 정치·경제·사회 분야를, 해외에서는 뉴욕, 워싱턴, 홍콩에서 세계를 지켜봤다. 대통령, 총리부터 범죄인, 반군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과 교류했으며, 1999년에는 제10회 관훈클럽 최병우기자 기념 국제보도상을 수상했다.

스스로 신문사를 그만둔 뒤 글을 썼고 이후 청와대 비서관 등 공직 생활도 지냈다. 평소 인간의 본성, 마음, 심리학, 뇌과학, 명상 등에 관심이 많았으며 2018년부터 국내 저명한 심리학자들을 초빙, ‘8주 마음챙김 명상’ 강좌를 조선일보에 개설했다.

마음건강 종합 온라인매체인 마음건강 ‘길’(mindgil.com)을 2019년 창간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우울증 치유기 <나 요즘 마음이 힘들어서>, 40대 중년 위기를 다룬 <마흔이 내게 준 선물>, 한국 걸출한 인물들의 인생기 <내려올 때 보인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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