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헌표의 해피 레터

아버지의 빈 자리가 허전한 설날 고향집

글·사진 홍헌표 기자  201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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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한 달 전까지 아버지께서 산책하셨던 고향집 솔밭길.

언제 와도 마음 푸근한 고향인데 오늘은 마음 한 구석 허전함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안마당에서도 또렷이 들리는 파도 소리, 초저녁에도 깜깜해지는 집 뒤 소나무숲의 바람 소리 만큼이나 익숙한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아버지 없이 맞는 첫번째 설날입니다. 우리 가족은 세배 대신 차례상으로 아버지를 뵈었습니다. 평소에는 무뚝뚝해도 세뱃돈이 든 봉투를 주실 때는 덕담을 아끼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소탈한 웃음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병 치료를 위해 입원 수속을 받다가 심근경색으로 의식을 잃은 뒤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그게 26일 전의 일입니다.

고향 집 곳곳에는 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식사 때마다 앉으셨던 식탁 의자와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족보, 메모와 전화번호가 빼곡하게 적힌 여러 권의 메모장, 때 묻은 폴더폰을 볼 때마다 연탄 보일러가 뜨끈뜨끈하게 데워 놓은 건넌방에 아버지가 누워 계시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아버지가 쓰시던 서랍을 정리하다가 메모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 출신답게 누가 봐도 잘 쓴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필체였습니다.

아버지메모.jpg


1월1일 토요일
새해 아침 눈이 겹친 한파 날씨로
외출 못하고 노인회 회계 정부 정리
담배 2500원 買入
7시30분 日本 헌표에게서
8시40분 서울 극표 子婦에게서 電話
새해 아침 家族의 건강을 祈願
어느 해에 남기신 메모인지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전화를 드렸던 1월1일 토요일은 2011년, 그러니까 암 수술을 받고 2년 3개월여가 지났을 무렵입니다. 좀처럼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셨던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의 암 투병이 얼마나 걱정됐으면 ‘家族의 건강을 祈願’이라는 새해 소망을 쓰셨을까~. 한 문장 한 문장 반복해 읽으면서 8년 전의 아버지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고교 때부터 부모 곁을 떠나 살았던 제가 이럴진대 60년 이상 함께 사신 어머니는 오죽할까요. 200점을 받아도 부족할 만큼 아버지에게 잘 하셨던 어머니인데 “잘 못 해준 일, 아쉽고 미안한 일만 자꾸 생각난다"고 합니다.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병원 응급실에서 늦은 점심으로 죽을 드시던 모습을 자꾸 떠올리시면서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평생 ‘당신 수고했다. 고맙다’라는 말 한 마디 못 들었는데, 나한테 뭘 잘 한 게 있다고 내가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가슴앓이를 멈추지 못합니다. 자식들이 봐도 어머니에게 다정다감 하기는커녕 참 고집스럽고 재미없는 분이셨는데 말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빨리 잊으시라"고 "잠을 잘 주무셔야 한다"고 말씀드리겠지만 지금은 그냥 옆에서 어머니니 말씀을 들어드리는 게 최선입니다. 사별의 아픔은 그 누구의 위로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제 자신이 절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 선배 동료의 애정어린 말 한마디가 고마우면서도 텅빈 마음이 채워지지는 않네요.
 심리상담사인 친구는 어머니에게도 제게도 애도의 시간이 필요할거라고 그럽니다. “아버지에 대한 애도뿐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보낸 어머니의 삶에 대한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실거야. 어머니와 함께 울어 드리고, 옛 추억도 충분히 나눠."
눈 앞에 닥친 삶,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와 좋은 추억을 좀 더 많이 만들지 못한 게 참 많이 아쉽습니다. 후회 해도 소용 없는 일이겠지요. 더 이상 아쉬움이 없으려면, 또 다시 후회하지 않으려면 어머니 뵈러 고향에 더 자주 와야겠습니다. 자주 안아 드리고, 어머니께서 살아온 이야기를 마음껏 하시도록 다 들어드려야지요.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의 빈 자리도 채워지고 어머니의 얼굴에 웃음꽃이 자주 피겠지요. ■

 

글·사진ㅣ 홍헌표
조선일보 기자, 헬스조선 취재본부장을 거쳐 현재 ‘마음건강 길’ 편집장을 맡고 있다.2008년 대장암 3기로 수술을 받았으며, 암 재발을 막기 위해 면역력을 높이는 몸 습관, 마음 습관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
암투병 에세이 <나는 암이 고맙다> <암과의 동행 5년>을 썼으며 라이프 코치로 공공기관, 주요 기업 임직원 대상 강의, 코칭 상담 등을 진행하고 있다. 2011년 암 치유와 건강을 위해 만든 웃음 동호회 ‘웃음보따里’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다. 몸맘건강 네트워크 ㈜힐러넷 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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