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헌표의 해피레터

산티아고순례자의 길에서 만난 70대 부부

110km걸으며 삶의 이야기와 함께 힐링하다

글·사진 홍헌표 편집장  2019-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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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대성당.

오늘 아침 눈이 내렸는데 절기로는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우수(雨水)입니다. 머지 않아 봄이 온다는 뜻이지요. 그래서인지 마음은 자꾸 들뜹니다. sns에서 해외 여행 중인 지인의 소식을 읽거나 TV 홈쇼핑에서 여행 상품 광고를 볼 때마다 휴대폰에 저장된 옛 사진을 뒤적거리며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난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조만간 어디로든 가야 할 것 같네요. 누군가 “길은 나선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각만 하지 말고 일단 나서야 그 길을 차지한다는 의미이겠지요? 길에는 수많은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는 늘 옳습니다.
문득 몇 년 전 스페인 산티아고순례자의 길에서 만난 70대 중반 부부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전에 다니던 회사의 힐링 여행 프로그램 참가자 20여명을 모시고 갔을 때였습니다. 산티아고순례자의 길은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산티아고대성당으로 성지 순례를 가던 유럽의 수많은 길을 일컫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길이 프랑스의 생장 피 드 포르에서 시작해 산티아고대성당에 이르는 800km 거리의 ‘프랑스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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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순례자의 길 공식 이정표에는 조가비 문양이 있다.

우리 일행은 ‘프랑스 길’ 후반부(사리아~산타아고대성당) 110km 구간을 5박6일간 걸었는데, 사전 준비를 충분히 하지 않으면 젊은 사람들도 발에 물집이 잡히는 등 크고 작은 부상을 입기 쉽습니다. 그런데 몸 상태도 별로 좋지 않은 70대 부부가 두 딸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길을 걷겠다고 나선 겁니다.

당시 73세였던 이 선생님은 “나이 오십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적이 있었고, 통풍을 앓았고, 몇 년 전에는 척추 수술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행 프로그램 신청 후에도 컨디션이 나빠져 두 번이나 병원에 다녀왔다는데, “의사 선생님이 동행한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왔다"고 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이 선생님의 부인은 오래 전부터 산티아고순례자의 길을 걷고 싶었지만 딸들의 반대 때문에, 남편 상태 때문에 꿈을 접을 뻔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꿈이 이뤄졌습니다. 부인은 “이 순간이 올 것을 누가 알았겠느냐"며 “하느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10~18km씩 걷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참가자들은 각자 자신의 몸 상태에 맞춰 걷는데, 발걸음이 느리거나 체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오전 9시에 출발해도 오후 5시 넘어야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저는 맨 뒤에서 걷는 분 담당이었었는데, 둘째 날에는 왼발 통증이 심했던 이 선생님 부인과 오전 5시간을 함께 걸었습니다. 부인은 한국전쟁 중 1.4 후퇴 때 해주에서 가족과 함께 남하한 이야기, 남편(이 선생님)을 만난 이야기, 세 딸을 키우고 손주를 봐주며 살아가는 이야기, 남편에 대한 불만, 불교에 심취해 불경 필사를 했더니 다혈질 남편이 달라졌다는 이야기까지,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아 뒀던 이야기를 하나 둘씩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때론 심리상담사가 되고, 때론 남동생이 되어 함께 웃고 눈물 지었습니다. 함께 걸었던 5시간이 그 분에겐 ‘상담 시간’이었고, 제겐 인생 선배의 체험담을 통해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게 진정한 힐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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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 오후엔 이 선생님이 맨 꼴찌였습니다. “저는요, 허리가 아파서 하루 종일 걷지는 못하고 하루는 오전만, 하루는 오후만 걸어야 해요~." 이번에도 제가 이 선생님의 말동무가 되었죠. 이 선생님 역시 자신의 지나온 삶을 인생극장처럼 보여줍니다. 바로 전날 부인의 이야기를 통해 두 분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하는 사람이 바뀌니 관점도 다르더군요. 사실은 같지만 판단과 감정은 다르더라는 거죠. 똑 같은 일을 두고 부부가 서로 자기 입장에서 판단하고 서로가 서운한 감정을 안고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인생이고 사람 사이의 관계인 것 같습니다.
저를 깜짝 놀라게 한 이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 “그런데 말입니다, 홍 이사님. 제가 참 다혈질이고, 권위적인 건 맞아요. 아마 제 집 사람이 많이 힘들었을거예요, 미안하지요." 저를 통해 부인께 사과를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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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에 남은 수많은 이야기들.

드디어 산티아고대성당에 도착하는 마지막 날. 이 선생님이 제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홍이사님. 오늘은 오전, 오후 다 걸을 겁니다. 우리 부부가 손을 꼭 잡고 산티아고대성당에 들어갈 거니까 좀 늦더라도 봐주세요~." 그리고 두 분은 해가 져서 성당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불편한 발을 이끌고 우리 일행의 박수를 받으며 도착했습니다. 저녁 뒤풀이 시간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두 분의 이야기에 나머지 일행들은 한참동안 박수를 보냈습니다.

52세에 산티아고순례자의 길 800km를 두 번 걸은 뒤 세상을 떴다는 노르웨이 여성의 사진, 딸을 그리워 하는 아빠의 부정이 담긴 편지, 누군가 신었던 신발을 던져 놓은 돌무덤… 산티아고순례자의 길엔 세계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어디 그 길만 있나요. 제주올레, 일본 오헨로길도 있고 우리 동네 뒷동산의 이름 모를 작은 길도 있습니다. 올 봄엔 어느 길이든 걸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글·사진ㅣ 홍헌표
조선일보 기자, 헬스조선 취재본부장을 거쳐 현재 ‘마음건강 길’ 편집장을 맡고 있다.2008년 대장암 3기로 수술을 받았으며, 암 재발을 막기 위해 면역력을 높이는 몸 습관, 마음 습관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
암투병 에세이 <나는 암이 고맙다> <암과의 동행 5년>을 썼으며 라이프 코치로 공공기관, 주요 기업 임직원 대상 강의, 코칭 상담 등을 진행하고 있다. 2011년 암 치유와 건강을 위해 만든 웃음 동호회 ‘웃음보따里’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다. 몸맘건강 네트워크 ㈜힐러넷 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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