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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 치유하는 책읽기

원효와 요석의 사랑이 '천년 사랑'으로 기억되는 이유

사랑이 업이 되지 않고 도가 된 커플이기 때문

이주향  |  편집 명지예 기자  201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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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나는 내 자신이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거점이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저 특정한 경험이 일어나는 장소라 생각되는 것이지요. 희로애락이라 불리는 춤꾼들의 놀이터라고나 할까요? 어쩌면 우리가 로 느끼는 것은 흘러가는 감정의 격랑 속에서 흘러가지 못하고 맺혀있는 그 부분, 가슴이 막히고 기가 막혀서 생긴 상처 덩어리는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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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인연이 닿은 것이 원효였습니다. 원효는 불교의 고승이지만 굳이 불교라는 테두리에 가둘 필요는 없겠습니다. 내게 그는 일심(一心)의 철학자입니다. 원효의 대승철학은 그 일심을 설파하는 금강삼매경론으로 시작하고, 김형효 선생의 두터운 책은 저 문장에 대한 해체주의적 주해라 생각됩니다.

무릇 일심의 근원은 존재()와 무()를 떠나 홀로 해맑고 깨끗하며,
삼공(三空)의 바다는 진여와 세속을 융화하여 깊고 넉넉하다."

죽도록 그리운 것을 토해내지 못해 문득문득 심장이 아픈 게 우리네 인생인데, 때때로 진흙탕에 코를 박고 술 주정을 하고 싶은 게 우리네 인생인데, 종종 자존심을 칼날같이 세우느라 스스로 그 칼날에 다쳐 피를 흘리는 게 우리네 인생인데, 그 슬프고도 끈적거리는 존재를 어찌 떠나 해맑고 깨끗할 수 있을까요? 생에 속고 에 속아 심술궂게 뒤틀려 사랑은 없다고, 모든 게 헛것이었다고 박탈감을 호소하다 지치는 우리네 능력으로 어찌 세속과 탈속을 융화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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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은 맑고 깊고 넉넉한 우주의 마음, 마음의 근본 자리입니다. 그 마음은 번뇌 망상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존재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존재를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내 욕심이, 내 집착이, 어찌하기 힘든 내 자기사랑이 만들어 내는 분노와 번뇌와 불안을 꿰뚫어 보면서 무상을 깊게 성찰하게 하는 힘입니다. 사실 욕망에 집착하면 무상은 큰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고요해진 곳에서는 욕망도 죄가 되지 않고 무상도 망상이 되지 않고 진리가 되는 거 아닐까요?

원효는 요석을 겨우 사흘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사흘의 사랑을 천년의 사랑으로 기억하는 거지요? 사랑이 업()이 되지 않고 도()가 된 커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원효에게 파계는 파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혹적인 여인의 사랑에 집착하고 거기에 자기만이 거처할 수 있는 안락하고 이기적인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크고 진실한 여자의 사랑을 체험하여 경전 밖, 세상 속으로, 저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갈 힘을 얻은 겁니다.

완전한 하느님이 사랑의 힘으로 아픈 세상에 내려오신 것처럼, 원효는 금욕으로 청정한 비구라는 자존심도 버리고, 학문에 깊은 스승이라는 명예도 버리고 거친 세상 속으로 내려와 전염병자들, 거지들, 도적들의 진실한 친구가 됩니다. 원효는 요석이라는 여인을 만나 끊어내지 못한 욕정에 흔들리고 사흘 만에 후회한 무책임한 사내가 아니라 오욕칠정이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피안을 보고 열반을 본 각자(覺者)였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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