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치유하는 책읽기

생을 온통 지배하는 한순간이 당신에게는 언제였나?

사랑, 평생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이주향  |  편집 최인선 기자  201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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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쁠 때나 슬플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담담할 때나,
지금에야 생각해보니 누군가에게 편지가 쓰고 싶은 샘물처럼 차오르는 찰랑찰랑한 마음이 있다면 세상에 또 넘지 못할 산이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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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건강한 분노로 자신을 불사르는 것이 주류이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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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편지를 잘 보냈습니다.
헤세를 좋아하고 라즈니시를 좋아하고 성당에 다니면서도 불교를 좋아했던 그는
이상한 나라에서 여행 온 어린왕자 같았지요.
어느 날, 어린왕자는 음악테이프를 선물했습니다.
「목신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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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클래식이 저렇듯 감미로운가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사랑뿐이라고 온몸으로 주장하는 돈주앙처럼 가볍고 홀연해서 미워할 수 없는 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워할 수는 없지만 사랑할 수도 없다고!

그당시 나는 감미롭고 달콤한 것들은 모두 떨쳐내야 할 유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날이 서 있었을 때였으니까요...

신념에 찬 어른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열정적인 청년들이어서 많이 경직되어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였는지 오롯하게 꿈길을 걷는 듯한 향기로운 저 플루트 소리에 매혹되면서도 마음 놓고 빠져들지 못하고 한걸음 더 발을 내디디면 벼랑으로 떨어질 아이를 보는 심정으로 아찔한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몽환적인 곡을 좋아하는 지...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그가 너무 여리고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조심스러워서 세상을 바꿀 수 없는 남자라고 느꼈습니다.

 

사랑, 평생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그는 또 편지했습니다.
“풀밭에 털썩 앉았습니다. 청산은 문수의 눈, 물소리는 관음의 귀, 나는 행복한 중생입니다."

길지 않은 문장 사이로 그가 보였고, 그의 번뇌와 성찰이 보였고, 생이 보였고,
어렴풋이... 사랑도 보였던 것 같네요.

차츰 나는 그의 편지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의 글씨체에 미소를 보내게 된 어느 날 그가 보내 준 「목신의 오후」가 눈에 띄었습니다.

음악은 듣는 사람에게로 열려 있는 거여서 마음에 도달되기 전에 미완성이라고...
그동안 민중의 아편처럼 달콤하게만 느껴졌던 목신의 오후가 그제서야 내게 온전한 모습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를 온전히 느끼기 시작하니 음악과 나의 호흡도, 음악이 나에게 흡수되는 온도도 달라진 거겠지요.

능청능청 감기는 봄바람처럼,
한여름 밤의 달콤한 꿈처럼,
바스러지는 가을햇살처럼,...
그 유혹은 죄가 아니라 생의 의미였습니다.

언제였을까요?
그와 오대산에 갔습니다. 일행이 많았지요.
그런데 그가 내게 다가와서 무심하게 툭,

“곁길로 가면 부처님 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이 있는데, 거기 가보지 않을래?"
우리는 몰래, 그러나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이탈했습니다.
이탈은 모험이었고, 한여름 밤의 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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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으로 가는 길, 걸어 보셨습니까?

세상도 없고 ‘나’도 없는 그 적멸이 낙(樂)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의 손을 잡았는지, 그가 내 손을 잡았는지 아직도 그건 모르겠지만...


나는 손에도 표정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표정을 품게 되는 게 사랑이라고.
그 사람의 손은 포근하고 따뜻하고 간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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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는 평생 무의식을 지배하는 첫사랑의 잔영을 주인공 하지메가 추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녀가 딱 한 번 내 손을 쥔 일이 있다. 어딘가로 안내할 때 이쪽으로 오란 뜻으로 내 손을 잡았던 것이다......... 그때 그녀 손의 감촉을 지금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어떠한 것의 감촉과도 달랐다. 그 다섯 개의 손가락과 손바닥 안에는, 그때 내가 알고 싶었던 일들과 알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들 모두가 마치 샘플 케이스처럼 촘촘하게 들어차 있었다."

하지메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10초 동안, 자신이 완벽한 작은 새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하늘을 날며,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고. 내게는 꿈길이 된 적멸보궁이 그렇습니다.

그 적멸보궁길을 소나기 내린 뒤에 야생풀잎들이 풍기는 물씬한 풀내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가 간절한 기원으로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는 적멸보궁을 불경스럽게도,
감미롭고 달큰한 향기로 기억합니다.

그 찰나에서 천국을 만난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을 긍정하게 될 믿음의 씨앗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목신의 오후」는 인상주의 음악이네요. 드뷔시는 인상파 화가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인상파라고 하면 그 누구보다도 순간의 의미를 잘 알았던 예술가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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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위로 뜨거운 햇살이 축복처럼 쏟아지고

그 햇살의 사랑으로 깨끗하게 피어오른 모네의 「수련」...
수련은 물 수(水)자를 쓰지 않고 잠잘 수(睡)자를 씁니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만 그 영롱한 모습을 드러냈다가 햇살이 시들해지거나 태양이 저버리면
내리 잠만 자기 때문이지요...

 

일년 중에 태양이 가장 뜨거운 때 겨우 3일을 피고지고, 피고지고,
짧은 만큼 매혹적으로 찬란하게 자신을 드러낸 수련은 영원히 물로 돌아가
침묵 같은 긴 잠에 빠져듭니다.

생이란 어쩌면 어느 한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을 온통 지배하는 한순간이 당신에게는 언제였나요?
「목신의 오후」는, 생을 온통 지배해 버린 한순간, 그러니까 어찌하여 세상은 이리도 푸근하고 간곡하냐고 고백할 때의 음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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