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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연재 | 오십 즈음에 (31)

어느 날 목사님 설교에 울음을 터뜨리다

힘들고 방황한 청소년기에서도 얻는 것들

한강 작가  2020-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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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듯이 인생은 고해(苦海)입니다. 누구에게나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뜻하지 않게 찾아옵니다. 그래서 힘들어하고 고통 받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 고해는 단순한 생존투쟁(survival)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요구(calling)의 부름이자 기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고해를 감사하게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에 기꺼이 따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을 한 차원 높게 승화시켜 가십시오."  

어느 날 설교 주제는 ‘버림받음 너머 다시 가질 꿈’이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인생에서나…. 

저는 여기서 왜 그렇게 됐나, 어떻게 하면 치유될까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그같은 ‘버림’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의미를 깨달으신 분이라면 하나님께 나가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일하십시오. 내가 편안하게, 내가 안락하게 사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목사님은 실화를 소개했다.

한 아주머니가 음주운전자의 차에 치여 생떼같은 자식을 잃었습니다. 본인 자신도 사경을 헤매다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감과 증오심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녀는 ‘음주운전 반대모임(meeting against drunken driving)’을 결성하고 음주운전 퇴치를 벌이는 사회운동가로 변신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깨닫고 실천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란 책을 쓴 조엘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얼굴을 보면 온통 화상으로 인해 끔찍한 몰골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고 천사와 같습니다. 그 역시 음주운전자에 의해 부모를 잃었습니다. 차에선 불이 났습니다. 당시 갓난 아이였던 그는 3도 화상을 입고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흉측한 몰골과 불구의 사지였지만 그는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잘 견디고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그는 ‘증오로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희망과 용서와 긍정의 메시지를 전파합니다. 

여러분, 당신이 받은 상처를 우리 주변에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시오. 당신의 아픔을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로 쓰십시오.…


예배가 끝난 후 나는 차를 몰고 사무실로 향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일요일에도 출근했다. 

승용차 안에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려 시야를 가렸다. 급기야 어깨를 들먹이며 그 분출되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채 꺼억꺼억 울었다. 숨이 막히고 온 몸이 떨리기도 했다. 성인이 된 이후 이런 식으로 울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사무실로 들어선 뒤에야 울음은 그쳤다. 마음이 그렇게 개운하고 후련할 수가 없었다. 나는 테이블로 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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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셔서. 또한 제가 견딜만한 시련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는 힘들고 방황하고 위험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중학교 때 이미 술, 담배를 했다. 여자친구도 사귀었다.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서는 차비를 내지 않았다. 당시에는 버스 안내양이 있었는데 누나뻘인 안내양이 차비를 내라고 하면 “없어. 어쩔래"라며 무시했다.

나는 중학교 무시험 진학 1세대였다. 당시 서울은 지금처럼 넓지 않아 4학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용산구에 살던 나는 4학군에 속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용산, 동작, 서초, 강남, 관악, 영등포, 양천, 강서, 금천구 등에 사는 학생들이 속했다. 가난했던 1960년대말, 70년대초 시절 별의별 학생들이 다 있었다. 나는 그네들과 어울렸다. 내가 다니던 학교뿐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과도 사귀게 됐다. 지금 용산구 남영동은 이른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이 주로 용산, 영등포구 등에 사는 4군 학생들의 집결지가 됐다.

내 주변에는 꽤 쓸만한 ‘주먹’친구들이 있었다. 나보다 한·두살 위로 어려서부터 싸움질로 단련된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중학생 교복을 입고서 고등학생들을 두들겨 패곤 했다.

그들과 나는 사실 공통점이 별로 없었다. 나는 싸움꾼이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은 그들보다 좀 앞선 편이었다. 즉 나는 그들보다 머리가 앞섰고 그들은 나보다 주먹이 앞섰다. 이것이 묘한 보완관계가 돼 함께 어울려 다니게 된 것이다. 

패싸움을 할 때가 많았다. 나도 곁다리로 붙어 참여해보곤 했는데 이것이 가관이었다. 힘이 세고 싸움 잘하고 운동 잘하는 것과 승패는 무관했다. 문제는 기(氣)였다. 소위 ‘깡’이 세던가, 죽기 살기로 싸워보겠다는 ‘악’이 있다면 그 싸움은 승리였다.

예컨대 저쪽이 10명, 이쪽이 2명이라고 치자. 숫자로는 절대 부족인데 이 두 명이 한판 붙자고 먼저 달려든다면, 즉 먼저 선제공격을 통해 상대방 우두머리를 공격한다면 그 다음 결과는 뻔하다. 10명이 2명을 무서워 줄행랑을 치곤 한다. 당시 내 친구들은 이런 전투에 익숙했다. 적어도 싸움에 관한한 그들은 심리전에서 상대방을 이기고 있었다. 

나는 문제아였다. 우리 담임선생님의 문제아에 대한 해석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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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좋은데 공부안하는 놈"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집에서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저 공부 잘하고 어른 말씀 잘 듣고 정직한 아이라는 게 집안 어른들의 생각이었다.

이런 중학교 생활을 보내고 고등학교 시험을 치렀는데 1차에서 낙방하고 2차에 합격했다. 나는 학교생활에도 흥미를 잃었고, 자부심도 없어졌다. 그나마 하던 공부도 손에서 놨다. 

고등학교 1학년 입학한 뒤 나는 동네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조부모님의 권유에서였다. 교회에 나가 또래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나는 나쁜 행동을 계속 했다. 교회 아이들은 과거 내 친구들에 비해서는 훨씬 양질이었는데 여기에서도 문제아들은 있었다.

그런 방황을 거치면서 나는 사춘기를 보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낯 뜨거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이해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런 일탈행위를 통해 얻는 것도 있었다. 사람은 실수를 해봐야 실수를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 실수를 해봐야 남의 실수에 대해 관대하게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주먹친구건, 교회친구건 본래 인성(人性)이 나쁜 친구는 없었다. 다만 그 시절 주변 환경이, 살아온 삶이, 내면의 혼란이 그런 식으로 우리를 이끌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어린 시절에 다닌 교회의 추억은 결국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들었다. 교회에 나가든, 나가지 않든 그 이후부터 나는 간혹 기도를 했으며, 어른이 돼 집안 의식을 주도할 때도 기독교식으로 예배를 주관하곤 했다. 나이 40대 중반을 지나면서 나는 교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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