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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탐구

국정원장 내정자, 박지원의 인생 여정

좌익의 아들, 성공한 재미교포, DJ의 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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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2월 5공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고 6공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다. 국내 여론은 곧바로 5공 비리 수사를 요구했고, 첫 번째로 전 전 대통령의 친동생 전경환씨를 지목했다. 전씨는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을 지내면서 위세를 부린 인물이었다.

당시 뉴욕지사에서 근무하던 나는 뉴욕에 있다는 전씨 재산 추적에 나섰다. 전씨와 가까웠던 교포들부터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뉴욕 한인회장과 미주지역 한인회 총연합회장을 지낸 박지원씨를 지목했다. 그를 ‘전경환의 오른팔’로 부르는 이도, “전씨가 뉴욕에 오면 그 사람이 다 책임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즉시 수소문했으나 그는 이미 한국에 가고 없었다. 

그는 1970년대 초 이민 와서 사업가로 성공했고, 뉴욕 한인회장으로 있던 81년 전 대통령의 방미환영위원장을 맡았다.전 대통령이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뒤 레이건 미국 대통령 취임에 맞춰 방미했을 때 뉴욕 호남향우회를 비롯해 교포들은 대대적인 반대시위를 준비했다. 그러나 A씨가 나서 이를 무마시켰고, 이후 뉴욕 평통자문위 회장도 맡고 정계 진출도 모색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전씨 부인과 장남 명의의 집을 발견했다.  

박지원은 87년 귀국 후 평민당에 입당했고 92년 14대 전국구 의원이 돼 DJ의 ‘대변인’으로 급부상한 뒤 승승장구해 동교동계 가신들을 제치고 DJ의 ‘No.1 맨’으로 자리를 굳혔다. 98년 DJ정권이 출범하자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장관을 역임했고 2001년 다시 청와대로 들어와 정책기획수석·비서실장을 지내며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했다.

 

나와의 첫 대면은 98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이 홍콩을 방문했을 때였다. 홍콩특파원이던 나는 특파원 중 유일하게 공식 만찬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당시 내가 홍콩 정부를 자주 출입하면서 이것저것을 요구하다 보니 행정수반 비서실에서 붙여준 별명이 ‘Mr. Persistent(끈질긴 친구)’. 그네들이 나름 배려해 준 것이었다. 막간을 이용해 박씨에게 다가가 “전경환을 압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얼버무리며 얼른 내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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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만남은 2001년 6월 이뤄졌다. 당시는 언론으로서 비상시국이었다. DJ 정권은 세무조사를 통해 그동안 벼르던 ‘언론 권력’을 손보자는 입장이었고, 보수언론은 ‘언론 탄압’으로 여기고 일전불사를 다짐했다. 해외에 있던 나 역시 갑자기 불려 들어와 사회부장을 맡게 됐다. 

국세청은 6월 20일 전국 23개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6개 언론사를 고발했다. 곧 검찰 수사와 사주 구속 등이 뒤따를 예정이었다.바로 이날 청와대 정책수석을 맡고 있던 박씨가 시내 한정식 집으로 중앙 일간지 사회부장단을 초대했다. ‘언론과의 전쟁’을 앞두고 ‘권력의 칼자루’을 쥔 박지원은 느긋한 모습이었다. 홍콩에서 단 한 번 나를 만났을 뿐인데도 마치 늘 보던 사람처럼 농담을 걸었다.

“대(大) 신문사 사회부장이 됐으면 오늘 이 자리에 구두 표 하나씩이라도 돌려야 되는 것 아니오?"

술판이 벌어졌다. 폭탄주가 돌고 농담이 오고 갔다. 박씨의 다소 호기 어린 모습에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 나는 13년 전 뉴욕 이야기를 꺼냈다. “박 수석, 뉴욕서 전경환과 그렇게 친했다면서요?"그 말에 박지원은 그날 처음으로 굳어진 표정을 보여 주었다.“아…, 뉴욕 한인회장을 하다 보면 의전상 다…."그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매우 가까웠다고 하던데…. 전경환의 ‘가방모찌’(어떤 사람의 가방을 메고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노릇을 했다면서요?"그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좀 거칠게 말을 했다. 어차피 권력과 언론 간의 갈등이 전면전으로 번진 판에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어쨌든 이날 이후 그는 내게 잘 대했다. 내가 전화를 걸면 즉각 받았고 어떤 사건에 대해 확인을 요청하면 적당히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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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도 손잡고 굽힐 줄 아는 인물

그는 여러 얼굴의 사나이다. 스스로 고백했듯 ‘좌익의 아들’이요, ‘성공한 재미교포 사업가’였고, ‘전경환의 오른팔’을 거쳐 ‘DJ의 충신’이 됐다. 그런 전력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과 칭찬 역시 극명하게 갈린다. 그는 세상에 굴신(屈身)할 줄 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모든 것을 굽히고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는 인물 같다. 언론사를 찾아가 간부들에게 거친 행동으로 권력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아들 뻘 되는 기자에게 공손히 술을 따르기도 한다.

그를 보면 이방원과 정몽주의 고사(古事)가 떠오른다. 박지원의 이력을 돌아보면 그는 정몽주보다 이방원 편에 설 인물이다. 정치적 스승인 DJ가 정치인의 덕목으로 강조한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商人的) 현실감각’ 중 그는 철저히 후자 쪽이다.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정치인 박지원의 존재 이유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박지원은 DJ의 충신이 되기까지 평생 주변인(outsider)으로 맴돌았고 끊임없이 권력 주변을 서성거렸다. 이후 자신의 연고인 호남 세력에 편입된 뒤에도 DJ 적손인 민주화 동지들로부터 그리 환영을 받지 못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떠난 후 수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DJ 사후 최고위원, 당 원내대표를 거치며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이 나라 정치인의 삶을 몸으로 통렬히 체험한 그이기에 도리어 속 좁고 척박한 한국적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념(理念)으로 포장된 이권(利權), 개혁(改革)으로 위장한 개악(改惡), 명분(名分)으로 치장한 명리(名利)와 더불어 혈연·학연·지연 등 온갖 연고(緣故)가 판치는 이 위선적 정치판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좌우를 넘나들며 ‘솔직하게’ 살아온 인물이다.

시도 때도 없이 ‘정의’를 부르짖는 조국, 최강욱류나, 입만 열면 ‘애국’을 외치는 김기춘, 친박·진박 세력도다 훨씬 솔직하고 진정성이 있게  내게는 느껴진다. 박지원은 문 대통령과 구원(舊怨)이 깊다. 박 전 의원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밀사로 북한 측과 첫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했고, 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정일에게 뒷돈 4억5000만달러를 건네는 역할을 맡았다. 불법대북송금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이 일로 그는 2003년 노무현 정부 때 특검 수사를 받고 수감됐다. 

당시 문대통령이 노무현 시절 민정수석이었다. 박지원은 지난 2015년 민주당 전당대회 때 TV토론에 나와 문 대통령을 향해 "왜 그 때 대북송금 특검을 해서 남북 관계를 망쳤냐"고 공개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 때 문 대통령은 "그만 좀 하시라"고 발끈했다. 

2017년 대선 때는 당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매일 아침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던 문 대통령을 비판해 '문모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문 대통령에 대해 연일 극찬해 '문생큐'로 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시 박지원답다. 정치인의 굴신(屈伸)에 있어서 박지원을 따라잡기가 어렵다. 

박지원은 국정원장 내정 통보를 받고 “역사와 대한민국, 그리고 대통령께 충성을 다하는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전문가도 아니고 국내정치만 한 사람, 불법 대북송금한 사람을 국정원장에 앉힌 것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박지원과 조선일보 사람들과 관계도 나쁘지 않다. 과거 김대중 정권하에서 조선일보 사주를 구속시키는 데 깊숙이 관여했지만 그에 대한 여론도 그닥 나쁘지 않고 개인적 교류들도 많다. 

아마 조선일보도 내심으로는 박지원의 역할에 대해 기대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 기대는 이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운동권적 사고에 머물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지금 정권의 핵심 586인사들에게 불어넣을 수 있는 현실적, 실용적 영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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