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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기도문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

“주여! 꼰대가 되지 않게 하소서”

류시화 엮음  |  편집 김혜인 기자  2020-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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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정말로 늙어 버릴 것을


저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저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 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삶을 

바로 잡고자 하는

열망으로 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저를 사려 깊으나 

시무룩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남에게 도움을 주되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가진 

크나큰 지혜의 창고를 

다 이용하지 못하는 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저도 결국엔 

친구가 몇 명 남아 있어야 하겠지요.


끝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지 않고

곧장 요점으로 날아가는

날개를 주소서.


내 팔다리, 

머리, 허리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막아 주소서.


내 신체의 고통은

해마다 늘어나고 


그것에 대해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은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얘기를 기꺼이 들어줄

은혜야 어찌 바라겠습니까만 


적어도 인내심을 갖고 

참아 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제 기억력을 좋게 해 주십사고

감히 청할 순 없사오나


제게 겸손 된 마음을 주시어


제 기억이 

다른 사람의 기억과 부딪칠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들게 하소서.


나도 가끔 틀릴 수 있다는

영광된 가르침을 주소서.


적당히 착하게 해 주소서, 

저는 성인까지 되고 싶진 않습니다만

어떤 성인들은

더불어 살기가 너무 어려우니까요.


그렇더라도

심술궂은 늙은이는 

그저

마귀의 자랑거리가 될 뿐입니다.


제가 

눈이 점점 어두워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저로 하여금

뜻하지 않은 곳에서 

선한 것을 보고


뜻밖의 사람에게서

좋은 재능을 발견하는 

능력을 주소서.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선뜻 말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주소서.


아멘


         - 류시화의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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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류시화(1959~)가 엮은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 수록된 기도문 중 하나. 이 시집은 인디언에서 수녀, 유대의 랍비, 회교의 신비주의 시인, 걸인, 에이즈 감염자, 가수 등 동서고금(東西古今), 지역과 시대를 뛰어넘은 다양한 무명씨들의 고백록이나 기도문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는 늙은 수녀가 요즘 말로 하면 “꼰대처럼 굴지 않게 해달라"고 신께 하소연하는 솔직하고 다소 코믹한 내용의 기도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지고, 간섭하거나 잔소리·훈계를 하기 좋아하며 자신의 떨어지는 신체적·정신적 능력에 민감해지는가보다. 
류시화는 시인이자 명상가다. 경희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1983~1990년에는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구도의 길을 떠났다. 이 기간 동안 명상서적 번역 작업을 했다. 이때 『성자가 된 청소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티벳 사자의 서』, 『장자, 도를 말하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등 명상과 인간의식 진화에 대한 주요 서적 40여 권을 번역하였다. 
1988년 '요가난다 명상센터' 등 미국 캘리포니아의 여러 명상센터를 체험하고, 『성자가 된 청소부』의 저자 바바 하리 다스와 만나게 된다. 1988년부터 열 차례에 걸쳐 인도를 여행하며, 라즈니쉬 명상센터에서 생활해왔다. 
그의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1989년~1998년 동안 21번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당시 대학생들로부터 가장 좋아하는 시인에 윤동주 김소월. 한용운과 함께 선정된 적도 있다. 
류시화는 1980~90년대 당시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주장하고 있는 민중주의자들로부터 “현실도피"라는 등의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이에 흔들리지 않고 초연하게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지켜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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